혹은2010. 7. 10. 14:30



   종종, 학습만화 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클리셰 중에 그런 것이 있다. 과거에서 온 인물, 예를들어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등이 타임머신이나 시공간의 뒤틀림 등으로 인해 현재에 도착, 평범한 누군가가 그들과 어울려 현재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 이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오는데 하나는 과거의 인물을 친근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명징하게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각을 바꾸는 효과가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누구나 인터넷을 검색하면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는지는 알기 어렵다. 구글링이나 네이버 검색으로 맛집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 검색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처럼.

   종종, 나는 그런 상상을 한다. 과거의 인물, 예를 들어 바타이유나 빨간머리의 ANNE이나 오백년 전 세상을 살아가던 무명씨에게 지금의 삶을 설명하는 것. 내가 입고있는 옷과, 출근해서 하는 일이나, 내가 사고싶어하는 물건이라던가. 당장 내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삼박 사일은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실은, 최소한 몇 달 전에는 당연하지 않았던 경우가 허다하다. 십 년 전의 나는 미투데이를 상상했을까?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검색엔진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너무 당연하게 쓰고 행동하는 것들이 불과 몇 년 동안 익숙해진 것들임을 생각해본다. 세종대왕에게 캐안습을 설명하자면, 음, 우선 달라진 한글 환경과 인터넷과 자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지. 뭐임에서 뭥미로 변하는 것을 설명하고 캐안습의 캐가 접두사 개에서 시작하는 걸 말해줘야겠지. 안습은 안구에 습기가 차는 것이고, 그런데 대왕님은 접두사라는 단어는 아시죠?

   종종, 과거에 만났다가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난다. 현재의 일상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지금의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 그 낯선 기분은 나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간극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순간이다. 얼마 전 만났던 친구는 자연스럽게 스타벅스에 가서 프라푸치노를 먹을 것을 제안했다. 왜냐하면 그를 만났던 고3의 나는 저녁 대신 카라멜 프라푸치노를 먹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나를 기억하지만, 그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매우 다르니까. 그때에 비해 평화롭고 온화해졌다는 얘기를 듣고 잠깐 멍하니 생각했다. 아, 내가 그랬었나.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좀 더 세속적인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과거의 그라면 얘기하지 않았을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오고, 몽상가였던 그를 기억하는 나는 잠깐 당황하기도 했다.

   종종,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함을 생각한다. 당연한 것은 없지만 일상은 당연한 듯 흘러간다. 익숙해져 있으므로 아무렇잖게 넘기는 것들이, 실은 변화라는 것을 생각한다. 감정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내가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들 안에 갇혀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함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 현실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은 이들에게 지금을 설명하고자 하는 클리셰는 그래서 클리셰가 되었다. 다른 클리셰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되풀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종종, 허공을 응시한다. 얼마 전 만났던 친구는 개통한지 몇 달 되지 않은 9호선 신논현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요새 이거 타고 다녀, 라고 그가 말했다. 익숙하게 지하철을 타러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변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허공을 응시하며 지금 내가 서 있는 땅을 느끼는 것. 왜 내가 여기 서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되풀이될 것이다. 영원히 안주하지 않고, 여기는 스쳐가는 곳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하고 의심하며 살아갈 것이다. 편안함을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이카리아
혹은2010. 7. 9. 18:45


  감정의 가장 큰 적은 그 감정의 진정성을 짚어보는, 말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다. 그 시선의 앞에서도 견고하게 유지되는 감정은 없고, 설령 있어도 시간 앞에 금방 허물어지더라. 자꾸만 가짜 감정을 만들어내고, 없는 생채기를 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금기가 상처를 만들고, 그 상처는 인생의 필수 영양소처럼 내게 자양분을 주고. 꿈에서 깨기 싫은 사람처럼 도리머리를 하며, 어떻게든 그 감정 안에 안주하고 싶었다. 지금 나는 힘들어. 나는 아파. 나는 널 좋아해. 나는 행복해. 화났어 뭐 이런 감정들은 그냥 순간이고, 그 뿌리를 찾아가다보면 허무하게 스러지고야 만다. 그걸 찾지 못한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사실 별로 아프지 않은 것들을 부풀린다. 지나치게 부푼 자의식이나 자기학대, 거짓말, 싸이월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줄로 감정을 건드리는 간지글들에서 결핍과 마주친다. 특징은 디테일이 생략된다는 것. 자신의 감정을 추상화시켜 던져놓는거지.
  지금의 내게 굳이 인생의 소설을 꼽으라고 한다면, 모파상의 목걸이를 꼽겠다. 가장 절실하게 와닿고, 사람의 감정이 다 그런 식인 것 같아서. 그러니까, 가짜 다이아몬드를 갚기 위해 꼬부라진 할머니가 되는 것이 두렵고 부럽다. 평생을 바칠만한, 밑 빠진 독처럼 감정을 퍼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나 인생을 걸만하지 않다.(그 목걸이가 가짜임을 알면서 청춘을 바칠수는 없다.) 쉽게 싫증내고 굳이 그 뿌리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남들보다 좀 더하겠지만, 남들이라고 덜하지 않을 것 같다. 타인의 감정, 그들이 보석처럼 쥔 것들이 이상하고, 어떤 신념이나 믿음 혹은 애정이나 분노, 증오마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게 된다. 그게 정말 사랑이고 신념이고 믿음이며 분노인가, 그 감정의 시작부터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긴 한건가, 그냥 그 감정의 급류 위에서 정신 못차리고 떠다니는 건 아닌가. 말끄러미, 오랫동안 숙고한 후에도 남아있는 감정이라면,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질투할 수 있을 것도 같다.


Posted by 이카리아
혹은2010. 5. 26. 14:18


  신종플루보다 무서운 질환이 있다. '상상력 결핍증'이다. 이 환자에 대한 예시를 들기 위해, 예전에 고종석의 칼럼 한 문단을 빌려오겠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것은 자유다. 세상에는 별 사람, 별별 취향이 다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무고하게 그의 손에 죽거나 다친 이들의 직계 가족이 지금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꼭 그를 찬양하고 싶으면,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 몸에 흘려보라. 또는 인연이 닿는 조폭에게 부탁해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얻어맞아 보라. 그러고 나서 아는 검사나 판사에게 부탁해 괜히 10년이고 15년이고 감옥살이를 해보라. 그 감옥살이 동안 역사학자 한홍구의 글을 읽어보라. 그 뒤에도 사람들 앞에서 박정희를 찬양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

  -고종석, '친일분자 박정희보다는' 중 발췌. 시사in 2009/12/12. 80p


  종종 폭력에 대해 무감한 사람들을 보고 소스라친다. 사실 슬래셔 무비를 보면서 태연하게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친구까지는 안 가도, 그냥 푹푹 칼로 찌르는 장면을 아무렇잖게 보는 사람들이 놀랍다. 내게는 올드보이도 어려웠다. 물론 이런 건 영상을 보고 곧장 매우 빠르게 통증을 상상하는 내 특성인 걸 안다. 같은 상황을 텍스트로 읽으면 덜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저건 영화의 문제다. 굳이 픽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까지 문제삼으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그러한 맥락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내가 보기엔 폭력이다 싶은 일들을 아무렇잖게 하는 사람들은 단지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학번이에요?"라는 질문이 얼마나 신중하게 던져야 하는지(초면에 던지는 것은 매우 차별적이고 무례하다) 모른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설명해 줘도 잘 모른다면?
  "파업하는 것들은 배가 불러서 그래. 그런 사람들 때문에 경제가 안되는 거야. 지들은 철밥통이면서..." 같은 말을 남발하는 사람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백 번 양보해서, 무식할 자유도 있으니까 하고 생각한다. 상종하지 않을 뿐. 그리고 얼마 전부터 나는 이런 사람들을 '상상력 결핍증 환자'라고 부른다. 모든 결핍이 그렇듯, 상상력 결핍증에도 증상이 있다. 상상력이 결핍된 사람들은 '내가 만약'이라는 단어를 모르며, 입장을 바꿀 줄 모른다. 자신이 쥔 기득권이 자기가 잘나서 주어진 줄 알며, 내가 당연한 듯 받고 있는 것을 위해 (사회 구조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정말, 상상력 결핍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박정희를 찬양하고, "여자들이 애를 안 낳으니까 나라가 망한다, 이기적이라서 그래"같은 소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입에 담는다. 용산 참사를 보면서 "아니 왜? 나가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 법적으로" 같은 소리를 한다. 타인을 때리고 그 사실을 무용담처럼 입에 담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고작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상상력 결핍'이다. 상상력이 없으므로 대충 들리는 얘기,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편견을 수용하는 것. 이건 머리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질병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를 처음 보며, 영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올드보이 정도의 영화를 보여주면 어떨까? 그 폭력성이 얼만큼의 충격으로 다가올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를 뽑고 칼로 쑤셔대는 영상을 보고도 아무렇잖을 수 있는 이면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 영상이 가짜로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관객들, 다른 하나는 영상에 대한 익숙함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수한 영상을 통해서 적당히 재단해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애정만세'의 마지막 부분 쯤에 한 20분짜리 롱테이크 신이 있다. 여자가 길을 걸어가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배경음악도 없고 편집도 없고 현란한 카메라 워킹도 없다. 사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편집도 배경음악도 없다. 지루한 장면들을 한참 지나쳐야 흥미로운 장면이 아주 잠깐 드러난다.
  '애정만세'를 함께 보던 학생들 중 깨어있었던 것은 나 포함해서 한 다섯 명쯤 되었던 것 같다. 드넓은 강의실에서 눈을 뜨고 그 영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미없고, 익숙치 않았으리라. 거기에서 지금까지 보던 영화와 무엇이 다른지 감각하고, 그 다름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테니까.



  미지근한 물에 들어가서,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로 깊은 사고를 거치고 모든 걸 아는 상태에서,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 몸에 흘려보고 박정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냥 손쉽게 남들이 떠드는 것에 젖었을 뿐이다. 제대로된 사고의 과정을 거치거나, 자신의 상황에 대입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소리를 입에 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시를 들지 않았을 뿐, 상대방의 상상력을 의심해볼만한 말들은 많이 있다. 순간순간 '살갗이 곤두선다'는 감각을 느낀다. 상상력 결핍증은 신종플루보다 빠른 속도로 이미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결핍증 주제에 심지어 전염성도 강하다는 게 믿을 수 없다. 개념있고 성실하고 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상력 결핍증 환자인 경우도 많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인종을 차별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동성애는 '다른'거지 '틀린'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몇 학번이에요?"는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는 경우도 보인다.

  상상력 결핍증 환자가 항변할 수도 있다. 다만 몰랐을 뿐이라고.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부분에서 상상력이 결핍될 수 있다. 평생동안 경계할 지점이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결핍을 굳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



Posted by 이카리아
혹은2010. 5. 25. 08:00

  도대체 뭐가 더럽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B단조 미사 전곡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나중에 알았다. 2006년에 LG 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 한국에 없었다... 한국이었어도 내게 바흐가 그만큼 어필하지 않았으니 아마 안갔겠지만. 바흐 음악을 많이 듣지만 대부분 챔발로 곡들 한정이다. 피아노보다 챔발로 소리가 더 좋거든. 아, 챔발로 공연하는 거 직접 보고 싶네.
  어쨌든 B단조 미사를 특히 좋아한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키리에Kyrie가 좋다.

  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의미다.

  키리에를 듣고 있으면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내 경우, 음악은 굉장히 즉각적인 감정 변화를 가지고 오는 매체인데, 이를테면 사진이나 그림 혹은 문학 등의 타 장르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다. 가장 빠른 시간에 사람을 지배하고 그 효과가 꽤 길다. 특히 어릴 때는 같은 음악을 되풀이해서 듣고 있으면 그 음악을 따라서 내 감정의 고저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종교곡이나 종교화는 좋아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요한의 목을 자르는 살로메라던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던지.
  무수한 유디트를 보았지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를 가장 좋아한다.



출 처 : www.artemisia-gentileschi.com
나폴리 버전. 이거 말고도 이 시리즈가 다섯 점 더 있다.



  오른쪽에 목을 베는 여자가 유디트. 왼쪽은 하녀.
  원래도 좋아하는 화가고 그림이지만, 민음사에서 나온 책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를 읽고 나서 그 애정이 배가되었다. 나폴리의 Capolodimonte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들를 일이 있으면 한 번 보러가고 싶다.

  대충 얘기하자면 이렇다. 아르테미시아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여자 화가인데, 화가의 딸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그러던 그녀를, 아버지의 친구였던 타시가 꼬드겨서 자는데 이 남자가 유부남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혼인빙자 간음 정도.(게다가 처음에는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여 성립한 강간이었으니, 더욱 용서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고소한다. 로마 최초의 성폭행 고소였으므로 시끄러워졌고, 그 와중에 고문도 당하고 이런저런 고초를 겪으나 결국 승소한다. 그리고 상대방은 (고작) 8개월 금고. 게다가 아르테미시아는 남자를 유혹했다는 죄목으로 1년간 감옥에 간다. 그 이후 그린 그림이 저 것인데, 목을 베이는 남자가 문제의 타시이고 목을 베는 여자가 아르테미시아다. 이 그림이 다른 그림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면,


Judith Victorious - Lucas Cranach The Elder 作
이런 식으로 목만 갖고 있다(우선 자르는 장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Judith - Climt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 유디트를 '환희에 찬' 모습으로 그려서 좀 말이 많았지만...
너무 최근작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언급할 순 없겠지.




Judith Beheading Holofernes - Caravaggio 作
혹은 이런 식의 표정.




  카라바조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죽어가는이었나, 또 가물가물) 장면을 보고 받은 인상을 갖고 그렸다고 한다.(실제로 카라바조는 자기 애인이나 죽은 창녀를 마리아로 그리기도 하고, 여튼 종교화 치고 되게 디테일하다. 카라바조 그림도 좋던데 난)
  여튼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그림의 인물의 표정은 굉장히 결단에 차 있다. 망설임없이 목을 베어버린다. 이전에 나왔던 유디트들이 대부분 겁에 질려있는 여자거나, 자른 후 나오는 길(한쪽에 목이 그려져있다) 일색인 반면 여기서는 대담하게 목을 벤다. 카라바조의 인물이 미간을 찌푸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자세히 보면, 혐오감? 역겨움을 참은 얼굴 표정이 있다. 피하지 않고 맞서야 하는 일이긴 한데 싫다...는 느낌. 난 카라바조보다는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쪽이 더 현실감이 있는 것 같다.
  시대를 감안했을 때,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엄청난 복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여기서 자기자신이 '더럽다'는 인식은 없잖아?



  요새는, 강간죄로 고소한다고 해서 '유혹한 죄'로 감옥을 가지 않는다. 그게 그르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려는 페티시를 경계한다. 불행 페티시는 정말 무섭다. 그건 사람의 움직임을 막아두고 고착화시키며 옴쭉달싹 할 수 없게 한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 피해자의 위치에 치환하며 움츠리기 시작하면 이후에 몸을 펴기가 힘들어진다. 실제로 자신이 아프고 괴로운 일을 객관적으로 나열할 수 없다면, 그건 화를 내거나 불행하다고 여길만한 일은 아니다. 이런 형태의 불행 페티시 중에서도 정말 징그러운 것이 술집 여자 혹은 창녀 페티시이다. 뭐 2차 안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심플하게 몸 파는 사람이라고 하자.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별들의 고향'의 경아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마인드 말이다. 실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런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진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창작하는 형태의 창작물 얘기다.

  요런 클리셰들이 많더라.
1. 가난하다(or 순진한데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해서 인생 망쳐졌다.)
2. 몸을 파는 것은 더럽다.(그러나 인물의 마인드는 깨끗하다.)
3. 건조하고 말이 없는 성격의, 생기가 빠진 주인공.

  아 심한 경우는 이런 것도 있다. 강간당했다고 '몸을 버렸으니'하는 이유로 술집에 간다. 뭐 이건... 한 번 매를 맞은 다음에 '이미 버린 몸이니'하고 매를 맞으러 가는거야?...

  나 빼먹은 거 있나? 꽤 많은 소설, 영화 같은 곳에서 저런 걸 접했는데 접할 때마다 이미지의 힘은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 실제로 집안 가족들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있어서 몸을 파는 사람들도 있긴 있겠지만 그건 소수고. 보통은 쉽게 돈 벌기 시작하면 그 길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던데.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저 더럽다는 인식 하에 괴로워하고, 상대방은 비난한다. 이쯤 되면 '넌 참 깨끗해'나 '너의 사랑이 나를 깨끗하게 해' 블라블라...
  이런 식의 인식이 되게 낡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주 눈에 띄더라고. 영화나 소설이나 팬픽 등에서 자주 눈에 띄는데... 이런 것들을 접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특히 이런 부분,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스스로가 더럽다고 되뇌이거나 상대방이 너 더러워라고 말하는 부분. 나 더러워 아니야 너는 더럽지 않아... 아 지겨워.




  애초에 성폭력 피해자들이 큰 수치심을 가지고 사는 이유 자체를 생각해보면 갑갑하다. 물론 그 상황에서 폭력적으로 당했다는 문제도 있겠지만 인식의 힘이 크다. 여자가 '그런'일을(아, 이 경우는 남자 포함. 약하고 힘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쓰자)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불쌍하게 여기는 동시에 더럽다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지금이 환향녀 소리하는 시대냐. 생각해보면 병자호란 때 나라 못 지켜서 끌려간 것도 억울한데, 수절을 못했다고 더러운 환향녀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도 참 불쌍하고.
  게다가 이 인식은 굉장히 이중적이다. 남자가 이 여자 저 여자랑 자고 돌아다니면 능력 있는 거고, 여자가 그러면 걸레다.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중고생을 보면 한 다섯배쯤 갑갑해지는데(저 어린 것들마저 저런 담론에 얽혀있다니 이 병신같은... 이란 느낌.), 이런 식의 담론이 형성되는 것은 성을 말하는 포즈가 계속 쉬쉬하고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형태의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을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소중하고 소중하게 두었다가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올바르다는 통념이 있다. 근데 이게 되게 사회적이고, 사회의 규범에 따라 가변적으로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이 '소중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가족 제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근데 가족제도가 깨지고 있다. 다들 이혼하잖아? 참고 살지 않으며, 편모나 편부 가정이라던가 동성애 가정 혹은 아이를 갖지 않는 가정 등이 생긴다. 게다가 성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서, 사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에게 아껴두었다 준다'가 색이 바랜지 오래라고. 근데 이런 시점에서도 아직도 그놈의 '더러워' 소리가 나온다는 게 기가막힌다는 거다.

  이성애적 관계 외에 동성애적 관계에서도, 삽입 성교만 놓고 얘기를 하자면 삽입을 하는 쪽은 '더럽다'라는 단어에서 더 자유롭다. 삽입을 당하는 쪽에다가 대고 '더럽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 남성-여성의 성교를 놓고 보았을 때 삽입을 하는 쪽이 남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결국 여자가 불리하게 만들어진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남자를 다 죽여버려야 해, 라던가 모든 여자는 피해자라던가 하는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여기에 군가산점과 군대와 꼴페미와 된장녀와 또 뭐 있지? 아 그래 임신과 출산에 관련한 덧글이 달리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덧붙이자면 이야기의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냥 덧글 안 달았으면 좋겠다. 이 글 뿐 아니라 모든 게시물에) 다만 이런 식으로 성을 인식하는 것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르테미시아가 목에 칼 들이대고 확 잘라버린(그림을 그린) 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편견을 갖고 사는가.



  그래서 강간을 당한 사람이 괜찮아,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신체적-정신적 피해 이외에 '인식적'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인식이 글러먹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술집 여성을 위시한 여성의 성교에 대해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 없이 쾌락을 위해서 혹은 돈을 벌 목적으로 혹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 벌어지는 모든 형태가 다 그저 성교이고 교미라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가자고. 그리고, 까놓고, 잠은 여자 혼자 자니?
  그리하여, 제발 그 소리 좀 안했으면 좋겠다. 더럽혀지고 깨끗하다는 것. 이것이 되풀이된 인식의 결과물이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물론 폭력에 노출되었으니 그것에 대한 상처는 있겠지만, 그 상처로 인해서 자신을 버리는 인식을 갖지 말자고. 강간 후의 그 무수한 상처의 큰 부분이, 아까부터 말하고 있는 '더럽다'는 인식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놈의 걸레 소리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소리다. 남이 다른 사람이랑 자거나 말거나, 그게 왜 걸레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틀에 박힌, 이미 이미지로 학습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뻔한 몸 파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진부하기까지 하다고. '술집 여자'라는 말이 욕이 되는 세상이니, 이 편견의 뿌리가 어디서부터인지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치만 틀린 건 틀린 거잖아.



  여자가 남자랑 자면 자기를 '준다'는 인식, 더럽다, 더럽힌다 이런 단어들이 정말 신물나게 지겹다. 하긴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자기는 무수한 여자들과 잔 걸 자랑으로 삼는 동시에 처녀와 결혼하리라고 천명하는 멍청이가 출몰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은 문제는 그 멍청이는 자기가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살고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하고 방황하다가 구원을 얻는다. 키리에 엘레이슨이니?

  강간이 정말 큰 범죄라는 글은 많이 읽었다. 살면서 정말 무수히 봤다. 몸과 정신을 죽이고 블라블라... 물론 약하고 예민한 신체부위이며 이후에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부분에서 맞는 말이다. 게다가 근친상간이(의외로) 많이 일어나고, 성범죄 가해자의 다수가 원래 아는 사이였다니 그럴 법도 하다. 자기 몸의 주체, 자기가 하고 싶고 싶지 않음을 결정할 수 없는 식의 문제로 생각하면 이건 큰 폭력이다. 다 맞는 말이고 인정한다. 위의 내 말이, 강간을 합리화시키자는 의도는 1g도 없다. 그러나 이 '맞는 부분'과 분명히 분리해서 생각해야한다. <'이미 몸을 버렸다'는 식의 자책>하고는 분리하자고. (고로, 몸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강간당해도 강간 맞다고.)

  섬세하게 세공한 은장도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 용도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더럽다고 자책하느니 차라리 칼을 들고 상대방의 목을 베어버리라고.



Posted by 이카리아
혹은2010. 5. 24. 08:00


  인생이 재미없을 때를 대비해 어린시절, 메모한 것이 있다.

 

1. 재미없다고 포기하지 말 것. 그리고 '재미없으니 하기싫어'라는 마음가짐인 상태에서, 이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지 말 것. 왜냐하면 하기 싫은 마음에, 이유를 갖다 붙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재미없는 상태, 를 언제나 당연한 듯 생각하지 말 것. 이때를 기준으로 사고하는 게 아니라, 이게 특별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행동해야한다. 이때 결정한 것들은 대부분 '일 안 벌인다'를 향해 달리고 뭐든 그만두고 쉬겠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하면 인생은 더욱 재미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움직여야 기분도, 머리도 굴러간다.

  2. 재미없고 하기싫고 남이 왜 저렇게 낑낑 열심히 사나 싶어도, 타인에게 입대지 말 것. 예를 들어 "뭐 그렇게 아둥바둥 해서 달라지는 게 있니?" 이런 소리. 남 열심히 사는 데 감히 한 마디 할 자격 없다는 거 명심할 것.
  -남 인생까지 재미없게 만들 자격은 없다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의적인 문제는 당연한 거고, 전혀 안 멋있다. 인생 달라지는 게 있는지 남는 게 있는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 재미 없다는 거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면 멋있는 줄 아는 사람들(특히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남자들 중 많다)을 생각할 것. 추접하다. 자기 인생 재미없다고 남한테 짜증 내고 신경질 내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는 거 재미없는 거, 쉽지 않은 거, 남는 거 없는 거 남들은 이미 옛날에 다 알던 거다. 이제야 겨우 알아놓고 유레카 외치며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꼴이다. 이미 수천년 전 남들이 다 깨달았던 문제 갖고 설치지 말자.

  3. 사는 거 재미없다고 사건 만들고(일 벌이고) 다니지 말 것. 나중에 수습 못하고, 인생 재미없는데 심지어 갑갑하게 된다.
  -연애가 삶을 나아지게 만든다는 건 착각. 물론 그 감정이라는 부분이 단기간에 사람을 바꾸는 부분은 크지만, 헐리우드 영화 빼고 누구 절실히 필요할 때 괜찮은 사람 나타나는 경우 없다. 배고플 때 마트 가면 음식 많이 사는 것과 같은 이치. 괜히 쓸데없는 거 사게 된다. 나중에 이거 수습하다보면 인생 더 재미없어진다.
  물론 '사건 만들고'는 연애 등의 인간관계만 포함하지 않는다. 생각 없이 덥썩 뭐 배운다던가, 장사한다던가, 누구랑 매일 산책을 한다던가 이런 거 저지르면 골치 아프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제일 수습하기 어렵다.

  4. (나처럼) 재미없어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도망갈 것.
  -그러나 나는 지키지 못했다. 이 메모를 할 때 내게 조언해 준 친구도  못 지켰는 걸. 왜냐하면 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타인의 천진난만함은 굉장히 거슬리기 때문이다.
 
  5. 어깃장 놓지 말 것.
  -특히 자기 인생 갖고 어깃장 놓지 말 것.
  똑같이 살면서도 고민할 수 있다. 삼일 재미 없었다고 팡파레 울리면서 말기 암 환자처럼 인생 정리하지 말 것.

  6. 남 탓하지 말 것.
  -자기 부모, 학교 다닐 때 괴롭힌 인간 누구누구누구누구, 학교 선배, 직장 상사, 전 여자친구, 동생 등등.
 '내가 얼마나 병신인가'를 증명할 방법은 그 외에도 무수하다.


  내 인생 재미없다고 해서 꼴사납게 굴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생기는 건 아니다. 심지어 꼴사나운 모습 보이는 사람들 중 인생이 언제나 재미 없는 것도 아니더라.

  사실 나 역시, 다 지켰는지는 좀 의문이다. 하지만 삶이 재미없고 색채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늘 되짚어 읽어보곤 한다.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5. 23. 15:00


한낮의 우울(The)Noonday demon : an atlas of depression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 저 / 민승남 역
민음사













  ‘금각사’로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우울증을 앓다 끝내 자살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에게 던진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 정도의 우울증은 하루 15분씩 라디오 체조만 해도 극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울증은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병은 아니다.


 


 

  “요새 주변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곧장 정정했다. “그게 아니라, 이제야 사람들이 그 병에 대해 알아차리기 시작한 거야.” 사무엘 베케트의 ‘이 세상의 눈물의 양은 항상 일정하다’는 말처럼 과거에도 현재에도 슬픔은 똑같이 존재한다. 달라진 것은 그 눈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뿐이다.
  현재 미국인의 3퍼센트인 1,900만 명가량이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고, 이 중에서 어린이가 200만 명이 넘으며 조울증 환자는 230만을 헤아린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정신 장애가 우울증이다. 2003년 10월 대한우울조울병학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20~60세 주부 1,000명 중 45퍼센트가 경증 이상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민음사에서 출간한 ‘한낮의 우울’이 출간 1년 만에 전세계에서 25만권이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22개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의 저자 ‘앤드류 솔로몬’은 소설가로, 자신의 이름으로 첫 소설을 출간했으며 ‘뉴요커’지에 글도 쓰고 있었다. 가족과도 잘 지내고, 하루에도 너댓 개의 파티에 참석하던 그가 어느 순간 침대에서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체험이 모든 우울증 환자의 것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가벼운 우울증만으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은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며 살기도 한다. 감기의 증상이 각기 다르듯,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었다고 해서 전부 같은 증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누군가는 잠깐씩 힘들거나, 깊은 감정을 느끼거나,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10분 정도 지속된다면 그건 일시적인 묘한 기분이다. 그러나 열 시간 이상 지속되면 성가신 발열(發熱)이며, 10년 이상 지속되면 커다란 타격을 주는 병이다.’(37쪽)는 대목처럼 우울증은 사람마다, 지속기간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 책의 제목인 ‘한낮의 우울’은 성경의 시편 90절에 나오는 ‘한낮의 악마’에서 따온 말이다. “여호와의 진실함은 방패로 너를 에워쌀 것이니, 너는 밤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로다 / 낮에 날아오는 화살도, 암흑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도, 침입도, 한낮의 악마도.” 여기서의 ‘한낮의 악마’는 백주에 분명하게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을 신에게서 떼어내는 존재인 우울증을 말한다. 우리는 우울증을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 정확히 바라볼 수 있지만, 그것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도 고통이 드라마틱하게 사라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저자는 꽤 많이 나아진 아직도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약을 먹는다. 그는 평생 이 약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우울함으로 고통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우울증으로 살아있는 시체처럼 살아가는 것을 근절하고 싶어 하며, 그 방법이 약물치료임을 믿는다. 물론 심리치료 역시 약물치료로 우울증을 다스린 이후에 재발을 막는 효과가 있으며, 우울증을 앓는 동안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와주지만 당장 힘든 것은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심리치료의 작동 방식, 그리고 항우울제의 종류와 부작용, 중독 여부 및 장단점을 설명하고, 전기치료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약이 삶을 흐릿하게 만들거나, 더 나쁜 상태로 몰고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한다. 지금 당장 고통 받고 있는데 장기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울증을 류머티즘 관절염이나 폐렴과 같은 하나의 질환으로 보며, 발목에 깁스를 한 사람에게 지금 곧장 나가 함께 춤추자고 권하지 않듯 마음이 힘들고 불편한 사람에게 억지로 밝아지라고 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병도 본인의 의지로 걸리지 않듯, 우울증 역시 자신이 원해서 걸린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의 의지로 나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립감을 덜어주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사랑이란 함께 있어 주는 것. 아무 조건 없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지. 꼭 무언가를 해 주려고 애쓸 필요도 없지. 난 그걸 배우게 됐어.’(643쪽)
  내가 그랬듯, 이 책을 통해 누군가가 비슷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일상이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덧붙임.

  저자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은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예일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뉴요커》, 《아트포럼》, 《뉴욕 타임스 매거진》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스탠퍼드, 예일, 하버드, 브라운 대학교 등에서 우울증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2001년 출간된 '한낮의 우울'은 <내셔널 북 어워드>를 포함하여 NDMDA(우울증 및 조울증 학회)의 <프리즘 어워드>, 영국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마인드 북> 등 11개상을 받았다.


Posted by 이카리아
혹은2010. 5. 22. 18:36

  0. 이 글은 특정 연예인을 겨냥하지 않았습니다.





  1. 어떤 잘못, 이를테면 음주운전이나 표절이나 군입대 관련 비리나 폭행 등을 저지른 연예인이 있다고 치자. 사람들은 그를 열심히 깔 것이다. 물론 평소 좋은 이미지를 획득해 둔 김제동이나 김장훈이나 유재석 같은, 국민 대부분이 좋은 정서로 받아들이는 연예인의 경우라면 그 피해는 덜하겠지만. 호감도가 정말 높거나 연령대가 높다면 좋게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

  2. 아마 김구라처럼 기존에 비호감인 연예인이라면 비난의 수위는 훨씬 높아질 것이다. 과거에 묻혀있던 혹은 적당히 넘어갔던 일들이 파헤쳐질 가능성도 있다.

  3. 비호감 연예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아이돌의 경우라면 훨씬 심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 비난의 정도를 예측하자면 여자아이돌<남자 아이돌이 될 것이다.

  3-1. 이 경우, 팬덤이 움직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그리고 팬덤의 움직임은 더 많은 마찰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팬들이 옹호글을 쓰는 과정에서 '팬 아닌 척'을 하며 글을 올리는 일도 잦다. 네티즌 사이에는 카스트가 존재하는데, 오타쿠와 아이돌의 팬은 카스트에서도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 인식만 놓고 따졌을 때, 아이돌의 팬이 오타쿠보다 훨씬 낮은 카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3-1-1. 이 과정에서 옹호글이 웃음의 소재와 그 아이돌의 팬덤 전체를 까는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저는 아이돌을 잘 모르는(팬이 아니라는 포석) N살의 남자(아주머니/학부형/학교 선생님/지나가던 떡집 아저씨)입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연예인 BBB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심한 것 같습니다."

  ex) 술에 취해 택시기사를 폭행한 아이돌 C군의 경우.
    "저는 개인택시 10년 경력의 택시기사입니다. 주로 여의도 근처에서 택시를 몰다가 종종 연예인들이 수모를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요, 연예인은 기사에 나면 안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바가지 요금을 씌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술을 먹은 연예인의 경우는 더 심하더군요. 여의도 주변의 기사식당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무용담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물론 C군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만, 전부터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cf. 이런 걸 사람들은 '개드립친다'고 부른다.

  4. 문제의 연예인을 겨냥한 패러디가 등장하며, 그 연예인은 웃기는 일의 대명사가 된다. 연예인 본인의 잘못 여하와 상관없는 예를 들자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떠돌거나, cd breaker 같은 UCC가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5. 이 모든 전사를 깔고, 연예인이 자살할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으로 돌아설 것이며, 동정론이 승할 것이다. 네티즌의 마녀사냥에 대한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 연예인이 저지른 잘못을 열심히 까던 인터넷 연예 뉴스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괴로워했으며 어떤 비난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사와 칼럼을 쓸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비난과 관계 없이, 개인의 애정사나 질환이나 사채 등의 다른 이유로 자살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 그의 죽음이 소진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만한 스토리가 날조될 가능성도 높다. 이 과정에서 그의 죽음에 일조한(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를 추모하는 에너지는 증폭되어 비난이 될 것이다.

  5-1. 네티즌에 대한 비난이 대세가 될 것이며, 동시에 연예 뉴스에 대한 공격도 계속 나오겠지. 싸이월드의 연예기사 베플에는 빈정거리는 내용과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내용이 동시에 올라올 것이다.

  5-2. 새로운 연예인이 이슈가 될 경우. 그 연예인이 어떤 잘못, 이를테면 음주운전이나 표절이나 군입대 관련 비리나 폭행 등을 저지른 상황에서 같은 패턴이 되풀이될 것이다. 특정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에 대한 비난 글에는 '우리 좋은 리플을 답시다. 죽은 &&&를 생각해 보아요.' 와 같은 내용의 선플 달기 운동이 벌어질 것이다.

  6. 여당에서는 네티즌의 악성 댓글을 근절하기 위한 법률을 입안할 것이다. 자살한 연예인의 이름을 따 '&&& 법'이라고 불릴 가능성도 농후하다.

  6-1. 시간이 지나면 연예인의 팬이나 가족 측에서 '&&&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을 청원할 것이다.

  7. 죽은 연예인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그 해 연말에 '돌아보는 2009 연예가 결산'에 다시 언급되거나, 또다른 연예인이 자살 혹은 사망할 경우 '최근 안타깝게 목숨을 거둔 n명의 연예인'과 함께 다루어지는 것을 제외하고 매체에서 그 이름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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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22. 11:58

이야기 파는 남자Sirkusdirektørens datter
요슈타인 가아더 저 / 박종대 역
이레














  자신에게 옷을 살 수 있는 무제한의 돈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돈은, 최소한 옷을 사는 데에 있어서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화수분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체형이, 최소한 자신의 눈에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치자.(완벽하다는 예는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그런 체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체형이라고 해도,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옷이 어울리는 체형은 없으므로.) 게다가 옷을 입는 것도 꽤 좋아하는 편인 당신이라면, 어떤 옷을 입을 때 안타까움은 쉽게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한 가지 전제를 덧붙인다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새 옷을 입은 당신의 모습을 보이기를 좋아하고, 세상은 한정되어 있다. 원한다면 어느 무도회장이나 학교 등의, 어느 집단 하나로 설정해도 좋다.
  그런 경우, 다시 말하지만 어떤 옷을 입을 때의 안타까움은 쉽게 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안타까움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이 옷을 입고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면 새 옷을 입을 당신을 바라볼 눈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당신을 좌절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다시 말하지만 옷을 살 수 있는 무제한의 돈이 있고 당신은 끊임없이 바뀌는 새 옷을 입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즐거움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니까 내가 나이가 먹을 수록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일이 줄어들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책을 읽으면서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책을 읽고 다른 책을 고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전엔, 이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미 내가 파고들어간 어떤 세계의 종말이(혹은 완결이) 가까워진다는 신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책장이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던 책은 예를들어 요슈타인 가아더의 카드의 비밀, 펄 벅의 대지, 에다 유우리의 우오즈미 시리즈, 에밀 졸라의 나나,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 같은 책이었다. 대부분 분량이 많고(다시 말해 내가 그 세계에 몰입할 충분할 시간을 주었고) 분명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어느 책인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겠냐만, 좀 성기게 짜인 세계의 경우는 깊이 몰입하기보다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 혹은 디테일을 바라볼 때 좀 먼 시각을 갖게 된다.

  대학 도서관은, 적어도 내가 다녔던 대학의 도서관은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장서가 엄청나게 방대하거나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직 내가 읽지 못한 재미있는 책들이 있고, 흥미로운 책을 신청하면 좀 늦지만 도착하기도 하며, 결정적으로 경쟁자가 많지 않아 보려고 들면 충분히 볼 수 있다. 한 번에 다섯 권을 빌릴 수 있고, 캠퍼스 두 곳을 오가니까 열 권의 책을 빌릴 수 있는 셈이다. '읽어 치운다'고 해도, 하루종일 책만 볼 수는 없고 그러므로 충분하다. 사실 졸업을 앞두고 가장 아쉬운 것은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보통의 공공도서관에 비해 연당 사들이는 책도 많으며 예대, 음대 등을 끼고 있으므로 예술 관련 장서도 많이 갖고 있고.

  여튼, 새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상징(다시 살펴보니 완벽하게 관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을 떠올린 것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이야기 파는 남자'를 읽다가였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는, 그 뒤에 다른 세계가 있지만 (설령 그 세계가 이 세계에 맞먹는, 흥미로운 것이고 사랑스럽더라도!) 어쨌든 이 세계가 줄어든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작가 지망생들은 종종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작가 구호소가 자신들의 출세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정말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괜찮은 소설 모티프만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글이 써질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허무맹랑한 믿음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만으로는 소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교하고 탄탄한 줄거리만으로도 안된다. 소설 하나가 완성되기 위해선 실제로 소설을 써나갈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설득력있는 화자도 배치해야 하고, 문체의 트릭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글을 쓰면서 좌절하는 것은 이런 식의 글쓰기 기교와 요령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12년간의 학교 교육을 받은 뒤에도 글쓰기를 아직 익히지 못했다면 글쓰기 학원에 등록해서 배울 수도 있다. 글쓰기 학원은 허다하고, 글쓰기 수요도 엄청나다. 반면에 쓸 거리는 귀하다. 그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만들려고 해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나타났다. 이러한 공백이 바로 내가 노리는 틈새시장이다.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가령 삶의 경험처럼 작가가 되려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가 부족한 이들이 많았다. 먼저 글을 쓴 뒤에 세상을 경험해도 된다는 믿음은 포스트모던적인 오해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작가의 삶을 살기위해 작가가 되고자 한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작가가 되려면 먼저 세상을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도 그에 대한 결정은 삶 자체가 내린다. 글이 삶의 결실이지, 삶이 글의 결실은 아닌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 이야기 파는 남자, 이레, 200~201쪽


  우선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위와 같은 형태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성찰하는 부분이다. 가아더는, 이전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깊고 예리한 성찰을 갖고 있다. 예를들어 '대체로 깊은 절망감을 직접 맛 본 사람이 타인을 위로하기 한결 쉬운법이다.' 같은.
  근본적으로 가아더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 읽을 수 있듯,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찰이나 사상을 쓰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이건 쉬운 것 같지만 꽤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꾼인 동시에 깊이 성찰하는 사람은, 정확히는 그런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내용이다. 페테르는 어릴 때 부터 넘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 이야기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한 가지 소설에 진득하니 몰입해 쓰지 못하는 그(소설가란 장시간, 때로는 몇 년씩, 하나의 사건에만 집중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에게는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편향적이고, 너무 현실 도피적인 일이었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에게 팔아 넘긴다. 거미줄을 자아내는 거미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뽑아내며.

 

  한 가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 역시 재능이다. 페테르는 자신이 하나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낭비라고 여기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몇 년 동안 한 가지 이야기에 진득하게 몰입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 역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 중 하나를 진득하니 앉아서 써나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소설창작방법론 첫 시간에 ㅇㄷㅎ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성급한 목표의식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졸업 때까지 등단할 것 혹은 몇 년 내로 등단할 것, 유명한 작가가 될 것 이런 식의 목표의식을 버리라는 말이었다. 성급한 목표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삶은 더 지옥이 된다. 목표의식은 삶을 도구화시키게 된다.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은 이십년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는 십여년 이상을 진득하니 앉아 쓰지 않았던가. 느긋한 마음으로, 뜨거운 신념을 갖고 확신있게. 당시의 내게 와닿는 말이었다. '투철한 자기 확신을 갖고'







  초등학교 4학년의 내가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느꼈던 분노와 좌절을 기억한다.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명백한 살의를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가 잘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면엔 이런 것이 있었다. 길고 긴 이야기를 쓰고, 여러 가지 세계(벨로캉과 알쏭달쏭 함정퀴즈의 라미레 부인이라던지, 지하 공동체 등의)를 진득하니 엮어내는 그것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전의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견고하고 깊던(물론 분량의 문제도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계에 대한 충격이었다. 아마 인식하는 한 최초의 충격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깊어진 상태에서 읽었다면 그렇게 순수하고 격한 감정을 느끼진 않았으리라.

  처음 책을 덮었을 때는 어린 시절의 페테르와 어린 시절의 나(세상 모든 것을 내 방식대로 상상해서 바꿔나가던)에 대해 생각했었다. 만약 내가 그 상상의 세계에 좀 더 탐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세계로 옮겨서 표현하려는 욕구가, 즉, 작가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던 나(이 책에서는 그 부분도 언급한다. 작가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틀렸다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생각한 것을 토대로 써나가야 한다고)를 떠올려보면 더 깊은 곳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드라마라는 최근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Drama. 물론, 비단 TV 드라마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 드라마는 일상에 내던지는 어떤 형태의 균열이며 때로는 인생 전체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가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 견고하게 짜여진 하나의 세계가 될 때, 내가 아는 한 가장 완전한 형태가 된다. 무수하게 떠다니는 이야기와 플롯들 사이에서 한 가지를 쥐고 앉아서 써나가야한다. 확신을 갖고.





+


덧붙이자면.
요슈타인 가아더는 실제로 만나면 정말 재미없는 사람일 것 같다. 엄청나게.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18. 21:00

함구Bouche Cousue

마자린 팽조 저/최연순 역

빗살무늬














  비밀은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단지 재미만을 느끼기에는 나는 비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벽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벽들은 내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내 육체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전부 말하고 싶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건망증. 나는 아무래도 건망증에 걸린 것 같다. 늘 건망증에 걸려 있던 것 같다. 열정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기억이 없고, 강렬한 순간도, 상징적인 순간도 나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모든 중요한 순간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하고 있고, 그 순간이 나의 아버지를 더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나는 어린 시절, 냄새가 주는 인상들, 목소리의 변화, 산책, 웃음, 휴가,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 대한 풍경만을 가지고 있다.
함구Bouche Cousue, 마자린 팽조, 빗살무늬, 29쪽




  비밀은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단지 재미만을 느끼기에는 나는 비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벽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벽들은 내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내 육체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119쪽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다. 당신의 그 넘치는 신중성 앞에서, 조용한 미소 앞에서, 나에 대해 말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렇게 사랑받고 싶다. 숨겨진 아이, 그러나 사랑받는 아이인 나는 자부심을 갖고 싶다.
당신의 사랑을 무기처럼, 영광처럼 흔들고 싶다. 모두가 갈망하는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응석받이 아이로, 약간 심술궂은 사람으로,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거만한 사람으로 나를 보여주고 싶다. 이 사랑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된다는 두려움에 더 이상 떨고 싶지 않다. 당신이 여기 내 옆에 있었으며, 당신 보란 듯이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내 옆에 있었으면. 가끔 그들을 죽여주었으면. 당신 앞에서 그들이 파리로, 애벌레로 변해버렸으면 좋겠다. 당신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말하기를, 이애는 내 딸이야. 그 애를 아프게 하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들이 두려움에 떨기를, 맞추어 입은 바지 속에 비겁함이라는 소변을 내보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 순진무구한 존재인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용서를 베푼다. 나의 격분은 당신의 시선 속에 담긴 분노 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분노도 나의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낼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노여움 그 자체가 아니고서는 나는 화를 낼 능력이 없다.
235쪽




  가끔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전혀 다른 체험을 겪은 사람의 증언이 겹칠 수 있는가. 왜 저 문장들이 내 살갖 위에서 흔적도 없이 스며드는가. 도대체 왜 내가 지하철에서 뜬금없이, 왈칵 터지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어야 하는가. 왜 어린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일들에 입도 열지 못하고 울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와중에 통증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를 부정해야하는가.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되면, 완전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예전이라면 이렇게 적어놓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되면, 삶이 조금 더 슬퍼질 것 같다. 혹은 조금 더 덤덤해지겠지.

  많이 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도 전부 말하고 싶다.



+

  마자린 팽조Mazarine Pingeot : 프랑스의 테랑Franois Maurice Marie Mitterrand 대통령이 큐레이터 안 팽조Anne Pingeot와의 혼외정사로 낳은 자식.
  스무 살까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지 못하고 자랐다. 하지만 미테랑은 자신의 법적인 부인 다니엘보다는 안과 마자린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시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미테랑은 사실이 밝혀진 이후 말년에 딸에게 자신의 자산 관리를 부탁했을 정도. 

  이후 1996년에 파리마치에서 파파라치가 터뜨렸는데(스무 살의 딸이 있다고) 오히려 프랑스 국민들은 잡지를 비난했다. 그건 대통령의 사생활일 뿐이라고. 프랑스에서 정치인의 사생활은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 사르코지는 유부남이면서, 남의 아내에게 12년을 구애해 결혼하지 않았는가. 사르코지는 심지어, 아내랑 서로 맞바람을 피운 후 TV에서 "다른 가족처럼 우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98년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을 두고 "수준 낮은 문화의 마녀 사냥"이라고 했으니까.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17. 19:00

욕망의 심리학Satisfaction : 내 마음은 상처받지 않는다

카트린 방세 저/이세진 역

북 폴리오








   욕망이 연결되면 문제인 양 몰아가는 느낌이 있다. 그런 금욕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욕망에 대한 혐오가 있는지도(그런 의미에서 과거 종교에 사로잡혀 속죄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유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는 늘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환되며, 살을 빼고 빼지 않고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러니까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자기를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체중 관리에 실패하면 의지 박약인 셈. 하지만 체중 조절은 매우 다양한 부분 중 일부일 뿐이며, 자신의 기준 체중이 모두 다를 수도 있고 건강과 관련될 수도 있다. 일에서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체중이 못마땅하다는 이유로 좌절할 것 없다는 거지.






  자기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없다. 그는 고독과 심원한 혼란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타인의 욕망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하고 그 시선들만이 그에게 삶을 부여한다.
  -욕망의 심리학, 카트린 방세, 185쪽

  때로는 정반대로, 자신이 타자의 문제들을 떠맡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타자를 돌봐주기를 좋아하고, 타자가 자신들을 돌봐주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타자를 돕고, 보호하며, 자신이 대우받고 싶은 방식대로 대우한다. (중략) 사실, 그들은 자신의 전능함을 발휘하고 싶은 욕망에 부응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타자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이상 타자는 자기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한다는 좋은 동기를 갖고 맹렬히 헌신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일차적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 있다. 그들은 이 한없는 친절과 광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205~206쪽



  이런 문제들을 두고 고민하는 것은 일견 우스운 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기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고 대면하게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저런 문장들을 절대적인 진리인 양 여기면 안된다는 것인데, 모든 문제를 단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증상을 보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
  아, 그리고 어떤 문제도 신경쓰고 곤두세우는 동안에는 해결되지 않더라. 추상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저 문장들을 온전한 문장으로 받아들여야 할 뿐, 그것을 자기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서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학하는 게 가장 안좋은 케이스인 것 같다. 저런 문장을 다이어리 구석에 베껴적은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욕망이 연결되면 문제인 양 몰아가는 느낌이 있다. 그런 금욕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욕망에 대한 혐오가 있는지도(그런 의미에서 과거 종교에 사로잡혀 속죄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유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는 늘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환되며, 살을 빼고 빼지 않고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러니까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자기를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체중 관리에 실패하면 의지 박약인 셈. 하지만 체중 조절은 매우 다양한 부분 중 일부일 뿐이며, 자신의 기준 체중이 모두 다를 수도 있고 건강과 관련될 수도 있다. 일에서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체중이 못마땅하다는 이유로 좌절할 것 없다는 거지.
  식욕 뿐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이나 성공에 대한 욕망마저 어느 선을 넘어서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쿨하다는 건 욕망이 없거나 최소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을 거쳐온 사람들이 보이는 '욕망 없는' 태도가 패배로 인한 좌절감과 더 이상 다치기 싫어서 내보이는 모습으로 보인다. 가끔 궁금한 것은 이런 욕망들의 기원을 캐들어가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 남들이 나를 더 멋지게 봐 주면 좋을 것 같아 멋진 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고 살을 빼는 것 아닌가? 오롯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움직이는 시간이라는 건 하루에 몇 분 정도나 될까? 아니면 몇 초?


  욕망을 바라보며 타아를 구분하는 것이 먼저다. 무언가를 할 때, 그 무게를 가늠하고 당연한 듯 흐름에 몸을 맡기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할만하지 않을까? 내 욕망인가 혹은 타인의 시선 내부에서 잘보이기 위함인가. 과연 다른 사람이 감탄하는 것을 위해 내가 이 정도의 수고를 해야하나? 그 감탄이라는 건 아주 짧고 유한한 것일 텐데? 설령 무한한 감탄과 찬사라고 하더라도,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인데?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