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리2010. 5. 23. 15:00


한낮의 우울(The)Noonday demon : an atlas of depression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 저 / 민승남 역
민음사













  ‘금각사’로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우울증을 앓다 끝내 자살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에게 던진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 정도의 우울증은 하루 15분씩 라디오 체조만 해도 극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울증은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병은 아니다.


 


 

  “요새 주변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곧장 정정했다. “그게 아니라, 이제야 사람들이 그 병에 대해 알아차리기 시작한 거야.” 사무엘 베케트의 ‘이 세상의 눈물의 양은 항상 일정하다’는 말처럼 과거에도 현재에도 슬픔은 똑같이 존재한다. 달라진 것은 그 눈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뿐이다.
  현재 미국인의 3퍼센트인 1,900만 명가량이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고, 이 중에서 어린이가 200만 명이 넘으며 조울증 환자는 230만을 헤아린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정신 장애가 우울증이다. 2003년 10월 대한우울조울병학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20~60세 주부 1,000명 중 45퍼센트가 경증 이상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민음사에서 출간한 ‘한낮의 우울’이 출간 1년 만에 전세계에서 25만권이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22개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의 저자 ‘앤드류 솔로몬’은 소설가로, 자신의 이름으로 첫 소설을 출간했으며 ‘뉴요커’지에 글도 쓰고 있었다. 가족과도 잘 지내고, 하루에도 너댓 개의 파티에 참석하던 그가 어느 순간 침대에서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체험이 모든 우울증 환자의 것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가벼운 우울증만으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은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며 살기도 한다. 감기의 증상이 각기 다르듯,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었다고 해서 전부 같은 증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누군가는 잠깐씩 힘들거나, 깊은 감정을 느끼거나,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10분 정도 지속된다면 그건 일시적인 묘한 기분이다. 그러나 열 시간 이상 지속되면 성가신 발열(發熱)이며, 10년 이상 지속되면 커다란 타격을 주는 병이다.’(37쪽)는 대목처럼 우울증은 사람마다, 지속기간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 책의 제목인 ‘한낮의 우울’은 성경의 시편 90절에 나오는 ‘한낮의 악마’에서 따온 말이다. “여호와의 진실함은 방패로 너를 에워쌀 것이니, 너는 밤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로다 / 낮에 날아오는 화살도, 암흑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도, 침입도, 한낮의 악마도.” 여기서의 ‘한낮의 악마’는 백주에 분명하게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을 신에게서 떼어내는 존재인 우울증을 말한다. 우리는 우울증을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 정확히 바라볼 수 있지만, 그것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도 고통이 드라마틱하게 사라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저자는 꽤 많이 나아진 아직도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약을 먹는다. 그는 평생 이 약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우울함으로 고통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우울증으로 살아있는 시체처럼 살아가는 것을 근절하고 싶어 하며, 그 방법이 약물치료임을 믿는다. 물론 심리치료 역시 약물치료로 우울증을 다스린 이후에 재발을 막는 효과가 있으며, 우울증을 앓는 동안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와주지만 당장 힘든 것은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심리치료의 작동 방식, 그리고 항우울제의 종류와 부작용, 중독 여부 및 장단점을 설명하고, 전기치료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약이 삶을 흐릿하게 만들거나, 더 나쁜 상태로 몰고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한다. 지금 당장 고통 받고 있는데 장기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울증을 류머티즘 관절염이나 폐렴과 같은 하나의 질환으로 보며, 발목에 깁스를 한 사람에게 지금 곧장 나가 함께 춤추자고 권하지 않듯 마음이 힘들고 불편한 사람에게 억지로 밝아지라고 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병도 본인의 의지로 걸리지 않듯, 우울증 역시 자신이 원해서 걸린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의 의지로 나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립감을 덜어주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사랑이란 함께 있어 주는 것. 아무 조건 없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지. 꼭 무언가를 해 주려고 애쓸 필요도 없지. 난 그걸 배우게 됐어.’(643쪽)
  내가 그랬듯, 이 책을 통해 누군가가 비슷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일상이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덧붙임.

  저자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은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예일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뉴요커》, 《아트포럼》, 《뉴욕 타임스 매거진》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스탠퍼드, 예일, 하버드, 브라운 대학교 등에서 우울증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2001년 출간된 '한낮의 우울'은 <내셔널 북 어워드>를 포함하여 NDMDA(우울증 및 조울증 학회)의 <프리즘 어워드>, 영국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마인드 북> 등 11개상을 받았다.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22. 11:58

이야기 파는 남자Sirkusdirektørens datter
요슈타인 가아더 저 / 박종대 역
이레














  자신에게 옷을 살 수 있는 무제한의 돈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돈은, 최소한 옷을 사는 데에 있어서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화수분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체형이, 최소한 자신의 눈에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치자.(완벽하다는 예는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그런 체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체형이라고 해도,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옷이 어울리는 체형은 없으므로.) 게다가 옷을 입는 것도 꽤 좋아하는 편인 당신이라면, 어떤 옷을 입을 때 안타까움은 쉽게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한 가지 전제를 덧붙인다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새 옷을 입은 당신의 모습을 보이기를 좋아하고, 세상은 한정되어 있다. 원한다면 어느 무도회장이나 학교 등의, 어느 집단 하나로 설정해도 좋다.
  그런 경우, 다시 말하지만 어떤 옷을 입을 때의 안타까움은 쉽게 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안타까움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이 옷을 입고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면 새 옷을 입을 당신을 바라볼 눈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당신을 좌절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다시 말하지만 옷을 살 수 있는 무제한의 돈이 있고 당신은 끊임없이 바뀌는 새 옷을 입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즐거움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니까 내가 나이가 먹을 수록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일이 줄어들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책을 읽으면서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책을 읽고 다른 책을 고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전엔, 이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미 내가 파고들어간 어떤 세계의 종말이(혹은 완결이) 가까워진다는 신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책장이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던 책은 예를들어 요슈타인 가아더의 카드의 비밀, 펄 벅의 대지, 에다 유우리의 우오즈미 시리즈, 에밀 졸라의 나나,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 같은 책이었다. 대부분 분량이 많고(다시 말해 내가 그 세계에 몰입할 충분할 시간을 주었고) 분명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어느 책인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겠냐만, 좀 성기게 짜인 세계의 경우는 깊이 몰입하기보다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 혹은 디테일을 바라볼 때 좀 먼 시각을 갖게 된다.

  대학 도서관은, 적어도 내가 다녔던 대학의 도서관은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장서가 엄청나게 방대하거나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직 내가 읽지 못한 재미있는 책들이 있고, 흥미로운 책을 신청하면 좀 늦지만 도착하기도 하며, 결정적으로 경쟁자가 많지 않아 보려고 들면 충분히 볼 수 있다. 한 번에 다섯 권을 빌릴 수 있고, 캠퍼스 두 곳을 오가니까 열 권의 책을 빌릴 수 있는 셈이다. '읽어 치운다'고 해도, 하루종일 책만 볼 수는 없고 그러므로 충분하다. 사실 졸업을 앞두고 가장 아쉬운 것은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보통의 공공도서관에 비해 연당 사들이는 책도 많으며 예대, 음대 등을 끼고 있으므로 예술 관련 장서도 많이 갖고 있고.

  여튼, 새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상징(다시 살펴보니 완벽하게 관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을 떠올린 것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이야기 파는 남자'를 읽다가였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는, 그 뒤에 다른 세계가 있지만 (설령 그 세계가 이 세계에 맞먹는, 흥미로운 것이고 사랑스럽더라도!) 어쨌든 이 세계가 줄어든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작가 지망생들은 종종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작가 구호소가 자신들의 출세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정말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괜찮은 소설 모티프만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글이 써질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허무맹랑한 믿음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만으로는 소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교하고 탄탄한 줄거리만으로도 안된다. 소설 하나가 완성되기 위해선 실제로 소설을 써나갈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설득력있는 화자도 배치해야 하고, 문체의 트릭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글을 쓰면서 좌절하는 것은 이런 식의 글쓰기 기교와 요령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12년간의 학교 교육을 받은 뒤에도 글쓰기를 아직 익히지 못했다면 글쓰기 학원에 등록해서 배울 수도 있다. 글쓰기 학원은 허다하고, 글쓰기 수요도 엄청나다. 반면에 쓸 거리는 귀하다. 그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만들려고 해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나타났다. 이러한 공백이 바로 내가 노리는 틈새시장이다.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가령 삶의 경험처럼 작가가 되려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가 부족한 이들이 많았다. 먼저 글을 쓴 뒤에 세상을 경험해도 된다는 믿음은 포스트모던적인 오해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작가의 삶을 살기위해 작가가 되고자 한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작가가 되려면 먼저 세상을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도 그에 대한 결정은 삶 자체가 내린다. 글이 삶의 결실이지, 삶이 글의 결실은 아닌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 이야기 파는 남자, 이레, 200~201쪽


  우선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위와 같은 형태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성찰하는 부분이다. 가아더는, 이전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깊고 예리한 성찰을 갖고 있다. 예를들어 '대체로 깊은 절망감을 직접 맛 본 사람이 타인을 위로하기 한결 쉬운법이다.' 같은.
  근본적으로 가아더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 읽을 수 있듯,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찰이나 사상을 쓰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이건 쉬운 것 같지만 꽤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꾼인 동시에 깊이 성찰하는 사람은, 정확히는 그런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내용이다. 페테르는 어릴 때 부터 넘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 이야기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한 가지 소설에 진득하니 몰입해 쓰지 못하는 그(소설가란 장시간, 때로는 몇 년씩, 하나의 사건에만 집중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에게는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편향적이고, 너무 현실 도피적인 일이었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에게 팔아 넘긴다. 거미줄을 자아내는 거미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뽑아내며.

 

  한 가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 역시 재능이다. 페테르는 자신이 하나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낭비라고 여기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몇 년 동안 한 가지 이야기에 진득하게 몰입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 역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 중 하나를 진득하니 앉아서 써나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소설창작방법론 첫 시간에 ㅇㄷㅎ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성급한 목표의식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졸업 때까지 등단할 것 혹은 몇 년 내로 등단할 것, 유명한 작가가 될 것 이런 식의 목표의식을 버리라는 말이었다. 성급한 목표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삶은 더 지옥이 된다. 목표의식은 삶을 도구화시키게 된다.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은 이십년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는 십여년 이상을 진득하니 앉아 쓰지 않았던가. 느긋한 마음으로, 뜨거운 신념을 갖고 확신있게. 당시의 내게 와닿는 말이었다. '투철한 자기 확신을 갖고'







  초등학교 4학년의 내가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느꼈던 분노와 좌절을 기억한다.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명백한 살의를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가 잘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면엔 이런 것이 있었다. 길고 긴 이야기를 쓰고, 여러 가지 세계(벨로캉과 알쏭달쏭 함정퀴즈의 라미레 부인이라던지, 지하 공동체 등의)를 진득하니 엮어내는 그것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전의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견고하고 깊던(물론 분량의 문제도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계에 대한 충격이었다. 아마 인식하는 한 최초의 충격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깊어진 상태에서 읽었다면 그렇게 순수하고 격한 감정을 느끼진 않았으리라.

  처음 책을 덮었을 때는 어린 시절의 페테르와 어린 시절의 나(세상 모든 것을 내 방식대로 상상해서 바꿔나가던)에 대해 생각했었다. 만약 내가 그 상상의 세계에 좀 더 탐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세계로 옮겨서 표현하려는 욕구가, 즉, 작가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던 나(이 책에서는 그 부분도 언급한다. 작가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틀렸다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생각한 것을 토대로 써나가야 한다고)를 떠올려보면 더 깊은 곳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드라마라는 최근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Drama. 물론, 비단 TV 드라마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 드라마는 일상에 내던지는 어떤 형태의 균열이며 때로는 인생 전체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가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 견고하게 짜여진 하나의 세계가 될 때, 내가 아는 한 가장 완전한 형태가 된다. 무수하게 떠다니는 이야기와 플롯들 사이에서 한 가지를 쥐고 앉아서 써나가야한다. 확신을 갖고.





+


덧붙이자면.
요슈타인 가아더는 실제로 만나면 정말 재미없는 사람일 것 같다. 엄청나게.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18. 21:00

함구Bouche Cousue

마자린 팽조 저/최연순 역

빗살무늬














  비밀은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단지 재미만을 느끼기에는 나는 비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벽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벽들은 내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내 육체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전부 말하고 싶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건망증. 나는 아무래도 건망증에 걸린 것 같다. 늘 건망증에 걸려 있던 것 같다. 열정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기억이 없고, 강렬한 순간도, 상징적인 순간도 나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모든 중요한 순간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하고 있고, 그 순간이 나의 아버지를 더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나는 어린 시절, 냄새가 주는 인상들, 목소리의 변화, 산책, 웃음, 휴가,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 대한 풍경만을 가지고 있다.
함구Bouche Cousue, 마자린 팽조, 빗살무늬, 29쪽




  비밀은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단지 재미만을 느끼기에는 나는 비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벽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벽들은 내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내 육체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119쪽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다. 당신의 그 넘치는 신중성 앞에서, 조용한 미소 앞에서, 나에 대해 말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렇게 사랑받고 싶다. 숨겨진 아이, 그러나 사랑받는 아이인 나는 자부심을 갖고 싶다.
당신의 사랑을 무기처럼, 영광처럼 흔들고 싶다. 모두가 갈망하는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응석받이 아이로, 약간 심술궂은 사람으로,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거만한 사람으로 나를 보여주고 싶다. 이 사랑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된다는 두려움에 더 이상 떨고 싶지 않다. 당신이 여기 내 옆에 있었으며, 당신 보란 듯이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내 옆에 있었으면. 가끔 그들을 죽여주었으면. 당신 앞에서 그들이 파리로, 애벌레로 변해버렸으면 좋겠다. 당신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말하기를, 이애는 내 딸이야. 그 애를 아프게 하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들이 두려움에 떨기를, 맞추어 입은 바지 속에 비겁함이라는 소변을 내보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 순진무구한 존재인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용서를 베푼다. 나의 격분은 당신의 시선 속에 담긴 분노 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분노도 나의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낼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노여움 그 자체가 아니고서는 나는 화를 낼 능력이 없다.
235쪽




  가끔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전혀 다른 체험을 겪은 사람의 증언이 겹칠 수 있는가. 왜 저 문장들이 내 살갖 위에서 흔적도 없이 스며드는가. 도대체 왜 내가 지하철에서 뜬금없이, 왈칵 터지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어야 하는가. 왜 어린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일들에 입도 열지 못하고 울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와중에 통증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를 부정해야하는가.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되면, 완전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예전이라면 이렇게 적어놓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되면, 삶이 조금 더 슬퍼질 것 같다. 혹은 조금 더 덤덤해지겠지.

  많이 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도 전부 말하고 싶다.



+

  마자린 팽조Mazarine Pingeot : 프랑스의 테랑Franois Maurice Marie Mitterrand 대통령이 큐레이터 안 팽조Anne Pingeot와의 혼외정사로 낳은 자식.
  스무 살까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지 못하고 자랐다. 하지만 미테랑은 자신의 법적인 부인 다니엘보다는 안과 마자린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시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미테랑은 사실이 밝혀진 이후 말년에 딸에게 자신의 자산 관리를 부탁했을 정도. 

  이후 1996년에 파리마치에서 파파라치가 터뜨렸는데(스무 살의 딸이 있다고) 오히려 프랑스 국민들은 잡지를 비난했다. 그건 대통령의 사생활일 뿐이라고. 프랑스에서 정치인의 사생활은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 사르코지는 유부남이면서, 남의 아내에게 12년을 구애해 결혼하지 않았는가. 사르코지는 심지어, 아내랑 서로 맞바람을 피운 후 TV에서 "다른 가족처럼 우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98년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을 두고 "수준 낮은 문화의 마녀 사냥"이라고 했으니까.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17. 19:00

욕망의 심리학Satisfaction : 내 마음은 상처받지 않는다

카트린 방세 저/이세진 역

북 폴리오








   욕망이 연결되면 문제인 양 몰아가는 느낌이 있다. 그런 금욕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욕망에 대한 혐오가 있는지도(그런 의미에서 과거 종교에 사로잡혀 속죄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유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는 늘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환되며, 살을 빼고 빼지 않고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러니까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자기를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체중 관리에 실패하면 의지 박약인 셈. 하지만 체중 조절은 매우 다양한 부분 중 일부일 뿐이며, 자신의 기준 체중이 모두 다를 수도 있고 건강과 관련될 수도 있다. 일에서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체중이 못마땅하다는 이유로 좌절할 것 없다는 거지.






  자기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없다. 그는 고독과 심원한 혼란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타인의 욕망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하고 그 시선들만이 그에게 삶을 부여한다.
  -욕망의 심리학, 카트린 방세, 185쪽

  때로는 정반대로, 자신이 타자의 문제들을 떠맡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타자를 돌봐주기를 좋아하고, 타자가 자신들을 돌봐주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타자를 돕고, 보호하며, 자신이 대우받고 싶은 방식대로 대우한다. (중략) 사실, 그들은 자신의 전능함을 발휘하고 싶은 욕망에 부응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타자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이상 타자는 자기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한다는 좋은 동기를 갖고 맹렬히 헌신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일차적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 있다. 그들은 이 한없는 친절과 광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205~206쪽



  이런 문제들을 두고 고민하는 것은 일견 우스운 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기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고 대면하게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저런 문장들을 절대적인 진리인 양 여기면 안된다는 것인데, 모든 문제를 단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증상을 보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
  아, 그리고 어떤 문제도 신경쓰고 곤두세우는 동안에는 해결되지 않더라. 추상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저 문장들을 온전한 문장으로 받아들여야 할 뿐, 그것을 자기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서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학하는 게 가장 안좋은 케이스인 것 같다. 저런 문장을 다이어리 구석에 베껴적은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욕망이 연결되면 문제인 양 몰아가는 느낌이 있다. 그런 금욕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욕망에 대한 혐오가 있는지도(그런 의미에서 과거 종교에 사로잡혀 속죄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유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는 늘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환되며, 살을 빼고 빼지 않고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러니까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자기를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체중 관리에 실패하면 의지 박약인 셈. 하지만 체중 조절은 매우 다양한 부분 중 일부일 뿐이며, 자신의 기준 체중이 모두 다를 수도 있고 건강과 관련될 수도 있다. 일에서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체중이 못마땅하다는 이유로 좌절할 것 없다는 거지.
  식욕 뿐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이나 성공에 대한 욕망마저 어느 선을 넘어서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쿨하다는 건 욕망이 없거나 최소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을 거쳐온 사람들이 보이는 '욕망 없는' 태도가 패배로 인한 좌절감과 더 이상 다치기 싫어서 내보이는 모습으로 보인다. 가끔 궁금한 것은 이런 욕망들의 기원을 캐들어가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 남들이 나를 더 멋지게 봐 주면 좋을 것 같아 멋진 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고 살을 빼는 것 아닌가? 오롯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움직이는 시간이라는 건 하루에 몇 분 정도나 될까? 아니면 몇 초?


  욕망을 바라보며 타아를 구분하는 것이 먼저다. 무언가를 할 때, 그 무게를 가늠하고 당연한 듯 흐름에 몸을 맡기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할만하지 않을까? 내 욕망인가 혹은 타인의 시선 내부에서 잘보이기 위함인가. 과연 다른 사람이 감탄하는 것을 위해 내가 이 정도의 수고를 해야하나? 그 감탄이라는 건 아주 짧고 유한한 것일 텐데? 설령 무한한 감탄과 찬사라고 하더라도,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인데?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5. 13:00


검은 마법과 쿠페빵永遠の出口

모리 에토森繪都 저 / 박미옥 역

휴먼앤북스Human&Books










 

 

  영원히.

  평생 동안.

  죽을 때까지.

  언니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봤다는 안타까움과 싸웠다. 그러나 나는 늘 싸움에서 패배했고,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을 진귀한 우표, 진짜랑 똑같이 닮은 가짜 미토고몬, 사이토의 노래 때문에 울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소중히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싶은데, 이 세상에는 내 눈이 닿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내 눈이 닿을 수 있었는데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에 안타까워하는 사이,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거꾸로 보자면 그것은 내가 그만큼 세상을 좁게 보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 세상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마음에 남길 수 있는 것들은 극히 한정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10p



  “있잖아, 아까 먹은 푸딩, 진짜 맛있었다. 유들유들 보드라운데 귤 알갱이가 속속 박혀있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본다고 엄마도 그러시더라. 근데 노리코는 영원히 못 먹네, 아까워서 어떻게 하니?”

  “그렇네.”

  “평생, 죽을 때까지 먹을 수 없을 텐데.”

  “그래, 그렇겠네.”

  언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얼렁뚱땅 마음에도 없는 대꾸를 했다. 처음에는 공연히 열을 바짝 올리던 언니도 서서히 기세가 꺾이더니, 급기야는 풀이 죽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내 방을 나갔다.

  “푸딩은 아직 내일 냉장고에 남아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라도 먹으렴.”

  진심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 때 이미 푸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영원’도 ‘일생의 단 한 번’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36p




  ‘창가의 토토’라던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혹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등의, 여자 소녀 화자를 가진 작품은 내게 30점은 먹고 들어간다. 내게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은 비교적 소통이 쉬우며, 이해도 편하다. 아직 어린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겠지만.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 ‘30점은 먹고 들어간’ 책이었다. 물론 노리코라는 인물은 토토나 박완서 자신, 앵무새 죽이기의 스카웃에 비해 훨씬 공감대가 적은 인물이긴 했지만 그것을 상쇄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대학시절 들었던 소설 수업의 테마는, ‘자기 드러내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소설쓰기였다. 자신이 겪고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소설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글들의 한계는 어지간해서는 경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픽션도 현실의 디테일 한두줄보다 견고하기 힘들며, 그런 이유로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상처를 써 와서 크게 칭찬받은 친구들의 경우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설로 고쳐오는 경우 제대로 소설화되지 못했다거나, 훨씬 질이 떨어진다거나, 논픽션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소설의 경우도 픽션보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느 정도 가공한 논픽션의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소설이 그만큼 견고하게 ‘화자의 어린 시절이라고 뻥을 치는’것이지 진짜 화자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자신의 구질구질한 부분을 드러내는 데 겁이 없다’는 것과 ‘필요이상의 자기 비하나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와, 내가 이 작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멋모르고 읽었던 초등학교 시절, 최소한 중후반까지는 그 소설을 픽션이라고 믿었으니까. 그건 내가 어렸고 그 무렵의 내 세계에서는 모든 이야기들이 픽션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결정적으로 그 소설의 인물들이 이리저리 잘 안배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순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일기처럼 부산하게 자신은 잘 알 수 있지만 타인은 모를 이야기를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논픽션을 적어내는 이들의 큰 실수 중 하나기도 하고. 그런데 박완서는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건너뛰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해서 축 늘어지지도 않았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천부적 자질을 타고났기 때문이리라.

  여튼, 이 작가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부분을 드러내는 데 겁이 없으며 필요이상의 자기비하나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부 내가 취약한 부분이다.


  “이곳은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많으니까, 점원도 설교를 정말 잘하네. 점장이 오면 교복만 보고도 우리 학교가 어딘지 금방 알아차릴 거야. 그러니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학교에 통보할 거라고 할 거란 말이지. 그렇게 되면 방법이 없으니까.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자. 학교에 알려지면 어차피 집에도 연락이 가게 되니까.”

  둘만 남게 되자, 히로는 빠른 말로 내게 지시를 내렸다.

  “물건 훔치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우발적으로 해버렸습니다, 이 정도로 해두는 거야. 학교에서 친구랑 싸웠다든지,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았다든지, 반 친구 돈이 없어진 게 나 때문이라고 했다든지. 이것저것 물어 피곤해지면 우는 시늉을 해서 좀 쉬자고.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살짝 들썩거리면 우는 것처럼 보이니까. 참, 노리코, 너 담배 갖고 있니?”

  “갖고 있어.”

  교복 코트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 히로는 그것을 구석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발로 꾹꾹 눌러 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좋아, 퍼팩트!”

  나는 솜씨 좋게 일을 처리하는 히로에게 감탄했다.


                              (……)


  두 장에 500엔 하는 도시락보 따위를.

  네 켤레에 천 엔 하는 양말을.

  바나나 향이 나는 립글로스를.

  어차피 붙잡힐 것이었다면 좀더 폼 나는 것으로 훔쳤으면 좋았을 것을.

  최소한 실크 스카프라든지 레이스가 달린 손가방이나 장미 향수 따위를. 이 아이들은 화려한 세계를 동경했다고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목적이 확실히 전해지는 그런 것들을.

  “쓸데없는 일이야.”  

  그때 옆에서 히로가 중얼거렸다. 

 “뭐랄까, 허망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확실히!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훔치는 일이 허사라면, 그래서 우리를 붙잡아 소란을 피우는 일도 허사다. 빨간 앞치마의 입에서 튀는 침도 설교도 모두가 허사다. 우리 부모님이 울든 화를 내든 그것도 허사이고, 히로 부모님의 휴머니즘도 어쩜 허사이리라. 밤늦게까지 노는 일도, 겉으로만 친구인 척하는 교우관계도……. 열네 살의 나는 쓸데없는 일투성이였다.

  “울어봤자 허사야.”

  히로의 속삭임으로 나는 자신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니가 귀엽대.”

  “누가?”

  “야스다가 니가 귀엽대.”

  “뭐? 누구라고?”

  “야스다. 야스다 켄이치. 아까 같이 있었잖아? 어떤 앤지 보고 싶냐니까, 약간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데리고 온 거야.”

  야스다 켄이치.

  먼 이국땅의 강 이름을 암송하듯이 나는 그 발음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봐도 그 이름은 여전히 먼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던 사람은 야스다 아츠시였으니까.

  “야스다…… 켄이치.”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은 그 이름을 듣고, 나는 그저 멍하니 도시락 뚜껑을 내려다보았다.


(……)


  야스다 아츠시는 키도 크고 잘생긴데다가 축구부 에이스이고,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으며, 패션 감각도 훌륭한 빛나는 1반의 태양이었지만, 성격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더럽고,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지저분한데다가 야스다 아츠시 때문에 눈물을 흘린 여자들은 아수라의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설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속으로 그리던 사람을 그렇게 쉽게 바꿔치기 할 수 있는 걸까?

  같은 야스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쉽게 교체 가능한 것일까?

  주위로부터 의견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왠지 모르게 고집스러워졌다. 야스다 아츠시를 두둔하고 싶어졌고, 야스다 켄이치를 멀리하고 싶어졌다. 가능하면 야스다 켄이치와 스칠 때도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야스다 켄이치가 있는 느낌이 들 때마다 발길을 홱 돌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야스다 켄이치의 시선은 나를 쫓아왔고, 사람이 뒤바뀐 것도 모르는 채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도 가나이가 전해주었던 한마디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노리코, 야스다가 니가 귀엽대.

-285~289p



  같은 시기, 소설 창작 수업 시간에 나온 이야기였는데 ‘어린 화자를 쓸 경우, 어른들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날카롭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시키고 상징적으로 드러내기에 쉬운 것은 어린 아이들의 또래 집단이다. 특히 학교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어떤 곳보다 한국이나 일본의 학교(다른 아시아계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읽은 적이 적다)가 훨씬 더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세상은 거시서사보다는 미시서사를 담론화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고, 소설 역시 커다랗고 대단한 이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작은 것들 혹은 개인적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나 역시 그 쪽이 더 취향에 맞고.


  한동안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적어도 내 아이가 읽을 책은 손수 골라 책꽂이에 꽂아주고 싶었는데, 로알드 달의 동화처럼 신랄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혀주고 싶었다. 교훈적인 내용이나 위인전은 내던져버리고. 태백산맥-아리랑처럼 한 시대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을 읽혀 균형된 시각을 잡아주고도 싶었고, 감각적인 시집을 읽히고 철학책을 보며 세상에 대해 고민할 기회도 주고 싶었다. 이 책 역시, 아이가 있다면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환상을 걷어낸 세상’을 보여주는 데 부합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나 세상을 단순화시키는 착각이 없이 약간은 신랄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크길 원했기 때문이다.

  나를 닮은 아이라면, 이 책을 읽는다고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느정도의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넘어짐조차 없이 안전하게 가는 인생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2. 15:32
부석사 : 2001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신경숙 외 저
문학사상사









  몇 년 전의 일이다.

   부석사에서 노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이 잘 나올 곳을 찾아 서서 이미 카메라 세팅까지 끝낸 상태였고, 나 역시 필름을 갈아 끼웠다. 손에 쥔 카메라에서 필름 내음이 났다. 사람들이 선 곳에서 멀찌감찌 떨어진 곳에서 아이팟을 켜 음악을 들으며, 신경숙의 문장들을 생각했다. 단순하게, 부석사에 있어서 부석사를 떠올렸지만 '그녀는 질서정연하게 잘 맞추어져 있는 것이면 모조리 어깃장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라는 문장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사람과는 다르다는 허영 혹은 나에게만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아'라고 생각한 까닭에 더 큰 충격을 받았던 옛 기억들을 오래오래 곱씹었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이팟을 내려놓고 사진기를 들었다. 사진은 마음에 드는 만큼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빛이 부족했고 흔들리지 않을까 저어되기도 했다. 날 자체가 너무 흐렸다. 트라이포드를 가져왔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연신 셔터를 눌렀다.
  디카였다면 구도를 잡은 후 수십 장을 찍어댈 것을, 필카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한 번 소모되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라니, 인생을 그처럼 조심조심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디카를 대하듯 대충, 결과를 보고 골라내는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잠깐 딴생각을 하는 새에 해는 쏙 들어가버리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 목이 허전해서 카메라 가방에 감아두었던 스카프를 둘렀다. 얄팍한 천조각이지만 따뜻했다.


  P가 결혼을 한 후에 그녀는 P와 함께 어울려다녔던 동료로부터 P의 말을 전해들었다. 자신이 약혼을 하고 칠개월이나 지난 후에 결혼을 했는데 그동안 단 한번도 그녀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며, 그녀보고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는 P의 말을.

  P에 대한 맹렬한 증오는 그때 싹이 텄다.

  그전까지 그녀는 P 생각을 하면 분간이 서질 않았다. 그녀는 P의 약혼기간 동안조차도 P의 변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P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건 P의 변심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의 변심을 확인한 뒤 자신이 받을 상처에 대해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심리상태로 그녀는 그 시간들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P에게는 그의 약혼 소식을 듣고 단 한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은 독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다니.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P가 그들의 관계 뒤처리까지도 그녀에게 전가하려 했다는 생각. 격렬한 감정이 목까지 차올라 그녀는 당장 P를 만나 따져묻고 싶었다. 그랬냐고 내가 너를 찾아가 왜 약혼상대가 자신이 아니고 그녀냐고 따져 물었다면, 눈물을 글썽이며 너에게 매달리기라도 했다면, 우리들의 관계가 다시 개선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냐고. 그때껏 자신은 인생을 살지 않고 그저 느껴만 왔다는 모멸감. P와 약혼한 여자가 그녀처럼 대학을 졸업한 후 오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서 겨우 오피스텔 하나를 세로 얻은 가난뱅이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 여자의 아버지가 P가 전공한 영문학계의 원로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모멸감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것들 때문에 변심할 P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무엇을 근거로 P와 자신의 사이에는 그런 속물적인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모두 그래도 나와 너는 그렇지 않아,라고 믿고 싶었던 저변에는 돌연 다른 얼굴이 되는 생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허영을 벗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녀가 자신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다닌 P만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세수를 하다가도 이를 닦다가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설령 그녀가 약혼기간중의 P를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P는 약혼녀와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감정의 사치를 누렸던 P. 길을 걷다가도 수시로 그러나 선뜩하게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것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을 때처럼 그랬을 것이다, 확인하며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이후 그녀는 질서정연하게 잘 맞추어져 있는 것이면 모조리 어깃장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신발장의 신발을 아무렇게나 섞어놓았고, 식당에 가면 나란히 놓여 있는 젓가락을 흐트려뜨려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가로수가 참을 수 없어 도끼로 나무둥치를 찍어내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보면 바둑판을 뒤엎어버리고 싶었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정장 차림의 남자들을 보면 다가가서 풀어버리고 싶어 손가락이 굼질거렸다.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망설이며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확 저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좌충우돌하던 나날이었다.
  -신경숙, 부석사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2. 12:29

용서의 기술Forgive to live : 심리학자의 용서 프로젝트
딕 티비츠 저 / 한미영 역
알마












  심리학자의 용서 프로젝트라는 가제가 붙은 딕 티비츠의 책 '용서의 기술'은 용서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자신이 다친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심리학 책과 연애서는 다들 단순한 이야기를 한다. <감정을 억누르면 결국 몸이 아프거나, 이후 더 심한 정신적 문제가 생긴다><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he's just not that into you. 그러니까 그 남자에게 전화하지 마라Don’t call that man!>라던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과거의 기억을 파고들 것. 작은 디테일이 아니라 큰 틀을 생각할 것. 막판에는 살짝 삼천포에 빠진다는 느낌도 들고, 처음 보는 생경한 얘기가 아니라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 번쯤 읽으면서 자신의 분노에 대해 그리고 용서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 대부분이 잘못된 이유에서 화를 담아두는 데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화를 해소하는 데에서도 잘못된 길을 택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 제시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써보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첫째, 아무 일도 없는 척하기 또는 상처 무시하기

  “아무일도 아니었어” “잊어버려. 더 심한 언행을 겪은 적도 있는걸” “벌써 다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다시 일이나 하자” 우리는 이런 말들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외면하고 상처의 심각성을 얕잡아 본다. 그리고 이렇게 해소되지 못한 상처들은 다시 살아나 우리를 물어뜯는 못된 성질을 발휘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친분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될 수도 있다.

 

  둘째, 다른 사람의 불공정한 행동에 집중하기

  나 자신에게 있는 문제점보다 다른 사람의 문제점을 알아보는 일이 늘 더 쉽다. 하지만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보지 않는 한 그 문제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다른 사람, 즉 자신의 행복조차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의 행동에만 집중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결국 낙담하고 불행해지며 외톨이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셋째, 제삼자에게 화풀이하기

  상처받아 화가 났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직접 상대할 수 없어서 이를테면 그 사람이 죽었거나 멀리 가버렸거나 또는 무서워서 대면할 수 없게 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다른 대상에게 표출하기도 한다. 이때 다른 대상은 보통 힘이 약하므로 그 분노에 그다지(혹은 전혀) 거부반응을 보이지 못한 채 분노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식으로 화풀이를 하면 빗나간 위로감이나마 맛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 내부에 똬리를 튼 비통함 때문에 비롯되는 심각한 결과들을 줄이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상처와 분노 때문에 피해자만 늘어나는 꼴이 된다.

 

  넷째, 분노 외면하기

  이것은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한 번 더 말하겠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분노를 해소하려고 한다. 그에 맞는 예를 찾아보자. 심리상담을 하는 친구가 우울증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 환자는 몇 년 동안 계속된 어떤 부당한 일을 설명하면서 거의 20년 전 이야기까지 들춰내며, 온갖 욕설을 내뱉고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걱정스러울 정도로 목에 핏대까지 솟았다고 한다. 그 사람이 말을 끝내자 내 친구는 그렇게 화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환자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화가 나다니요? 저 화 안났는데요.”

 

  다섯째, 마음 속으로 복수하는 장면을 생각하기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거나 심지어 잘못했다고 인정하지도 않으면 우리는 복수해서 되갚아줄 온갖 방법을 상상하면서 공평함을 되찾으려고 애쓴다. 이런 상상의 날개는 아주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꽤나 가능성 있는 내용이 되기도 한다. 현실에서 복수를 시도하든 안 하든, 이렇게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마치 그 사람에게 벌을 주고 내면세계에 공평함을 되찾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그러나 상상만으로는 현실의 삶이 공평해질 수 없으므로 우리를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여섯째, 약물, 술 음식 이용하기

  상처 입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그 고통을 없애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어두운 감정들을 화학물질로 가라앉히거나 산더미 같은 음식물로 달래보려고 한다. 이런 대처법은 어느 정도 일시적인 위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분노 때문에 생겨난 더 직접적인 문제 위에 의학적인 문제들을 한 트럭만큼 얹는 효과를 초래해 결국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든다.

 

  일곱째, 삶을 냉소적으로 대하기

  당신이 살면서 마주치는 냉소주의자 중 몇 사람은 오랫동안 지속된 깊은 상처를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화가 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기약하는 어떤 것이라도 솜씨 좋게 조롱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들은 비꼬고 조롱하는 데 전문가다. 그들은 자신이 한때 그려왔던 방식으로 삶이 진행되지 않자 이른바 ‘현실주의자’가 됨으로써 자신을 방어한다. 순진한 사람들의 천진난만한 희망에 비수를 꽂는데서 기쁨을 얻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와 같은 독이 되는 일곱 가지 전략은 효과도 없을 뿐더러, 사람들을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로 몰아간다. 만약 당신이 분노를 인정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다룰 건전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분노가 비통함으로 바뀌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결국 당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용서의 기술, 딕 티비츠, 알마, 85~89쪽





  내가 가장 많이 취하는 태도는 첫째, 넷째인 것 같다. 가장 경계하는 것은 셋째 그리고 일곱째. 분노의 씨앗은 타인에게 확산시키기 쉽고, 그 결과도 매우 치명적이며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가장 결정적인 예시로는 폭력가정에서 폭력성 혹은 상처를 안고 자란 사람들인데, 특히 어리고 약한 존재에게 벌이는 폭력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할 뿐 아니라 그에 연계된 다른 사람들까지 좀먹는다.
  그리고 일곱째. 물론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사람 편을 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의 희망을 파괴하는 것은 뭐라고 했든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냉소적인 사람은 실제로 굉장히 약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말 함부로 던지고, 시니컬한 외면에서 굉장히 얇은 거죽을 들춰내면 그 안에는 말랑한 속살이 있다. 신뢰하거나 믿는 것에 배신당했을 경우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부러 밀어낸달까. 연령이 어리고 자의식이 강하며 약한 사람들 중 냉소적인 사람을 많이 봤었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고, 어느 정도 동경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달라졌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아무것도'에는 '자기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것도 포함된다.


  어릴 때부터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돌리라'는 식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을 피하자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명징한 부분인 것 같다. 어차피 삶은 공평하지 않다. 상대방의 잘못 100%가 아닐 수도 있다('온전한 피해자'는 극히 드문 일이다. 특히 우리 일상에선). 분노한 원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커다랗게 부푼다. 사건의 내부에서는 사건을 온전히 볼 수 없고, 자기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변명만 덕지덕지 붙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실이 왜곡되기도 하고.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건 오직 본인만이 정할 수 있는 문제. 채근하지 말고 찬찬히 생각하라. 그러나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 당신의 삶은 지옥이다.

  이런 얘기다. 아주 단순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하지만 실제 자기 일이 되었을 때,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Posted by 이카리아
책의 자리2010. 4. 1. 18:13

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저












  위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얼른 여길 나가세요.

"나한테 굳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마라. 나를 인정하려는 것이면서도 차별하려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했던가? 잘 생각이 안 나네."(270쪽)



   이름만 보고 책을 사는 작가가 몇 있다. 요네하라 마리, 서경식, 움베르토 에코, 올리버 색스 등등. 구효서도 그런 작가 중 하나고, 지금까지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재미있는 글을 직조할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가사키 파파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도 한국인이 반, 일본인이 반. 그리고 한국의 서사는 과거에, 일본의 서사는 현재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현대사와 어느정도 얽혀있는데, 역사적인 부분은 배경으로 두고 인간 관계로 풀어낸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여튼 일본/한국, 과거/현재 그리고 정군과 한빈이란 두 아버지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스물 한 살의 성장기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한유나는 나가사키의 '넥스트 도어'라는 식당에서 일하는 스물 한 살의 조리사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까지 갔고, psheeee라는 아이디의 엄마가 (한유나의) 아버지 즉 자신의 남편을 만나 그녀를 낳을 때 까지의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준다. 두 이야기는 처음에는 겉돌지만 서서히 직조되는 식. 이야기의 구조만 볼 때는 굉장히 심플하고, 오래전부터 봐왔던 방식이라 편안하게 읽힌다. 흥미로운 스토리기도 하거니와, 캐릭터 역시 재미있다. 원래 구효서가 생생하게 상황이나 장면을 직조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다 치고.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이야기의 전개방식과 배경. 일본 소설이 뜨고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가 선택한 배경과 전개하면서 보이는 에피소드는 최근 유행하는 소설들의 요소를 부러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그런 방식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방식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특유의 장점들을 살려냈기 때문이리라. 뒷통수를 치는 것 같은 반전이나 엄청난 새로움은 없지만, 탄탄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좋다. 최근 신작을 낸 어떤 국내 작가의 책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것도 장점.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까지는 칭찬이었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복선으로 깔아놓는 이야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데다, 속도감을 조절하는 것도 약간 실패한 느낌이 든다. 물론 김훈이 쓴 여성화자보다는 낫지만(생리대에서 물비린내가 난다고 했나.........), 섬세한 감정 표현이 좀 더 들어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거리를 둔 것은 좋은데 너무 멀고, 스물 한 살의 개김성 투철한 여자애 치고 차분하다. 그것이 전반적인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가장 큰 단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구효서의 솜씨는 대단하다. 눈에 보일 것 같은, 흔한 것 같지만 살아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만드는 것의 그의 장점. 내게 가장 깊이 다가온 부분은 등장인물 중 하나인 히데오라는 캐릭터였다.


    물론, 히데오도 알고 있어요. 묻진 않았지만 히데오의 어머니는 말했다. 자기가 위탁아였다는 걸 열네 살 때 알았어요. 그때부터 웃기 시작하더군요.
  히데오는 언제나 밝게 웃으니까요, 라고 했던 건 내가 먼저였던가. 히데오의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달걀 돛단배 접시가 깨끗이 비어버린 뒤였다.
  그걸 안 뒤로 버릇처럼 웃더군요. 안면 근육에 이상이 생긴 아이처럼. 그냥 웃어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중에는 그게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지요. 욕을 해도 웃고 때려도 웃었으니까. 공부를 해서 알게 된 것들이 서오 엉기거나 소화되지 않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어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죠. 성적은 늘 톱이었지만 학교 활동은 제로 상태였어요.
  버려졌던 아이라는 사실을 안 것과 웃음, 그리고 머리속에서만 기능하는 지식과 잦은 이지메.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 건지 전 알 수 없었어요. 그런 현상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밖엔.
  나중에야 알았죠. 히데오의 웃음은 웃음이 아니라 견딤이라는 걸. 그 애는 무언가를 견디는 거였어요. 어쩌면 모든 걸. 견딜 때의 표정은 괴롭거나 심각해져야 하는 건데 히데오는 반대였어요. 괴롭고 심각하게 견딘다는 사실을 저와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히데오는 지나치게 착한 아이였으니까. 가족이 걱정할까 봐.
  하지만 그 때문에 웃는 것만은 아니었어요. 하도 애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까 어디서 누굴 만나든 나는 당신을 해칠 의사가 추호도 없습니다, 라고 지레 표현을 해버리는 거에요. 악수를 청하듯 웃음으로. 거기엔 더 슬픈 소망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 제발 나를 해치거나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언제부턴가 빈 접시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슬프고, 본능적이고, 극단적인 방어 포즈였던 거예요, 히데오의 웃음은. 그러지 마라, 울어라, 일러라, 덤벼라, 하고 가르쳐보지만 안 되었어요. 애들이 쥐어박는데도 그저 웃을 뿐이었지요. 덤벼봐, 하고 때려도 웃고, 울어봐, 하고 때려도 웃고, 한 번만 찡그리면 다시는 안 때리겠어, 라며 때려도 웃었어요.
  -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뿔, 166~167쪽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당한 거리감을 갖고 있다. 폭력과 상처와 아픔에 대해 담담해질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거리. 스물 한 살이 가질 수 있을까 싶은 그런 거리와 관조, 체념의 정서가 어느정도 흐르고 있고 그건 인물들이 뼛속부터(!)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이며, 이 소설의 인물이 아닌 현실의 우리 삶에서도 무수히 마주치는 약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에 슬픈 척, 특별한 척 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짜 상처'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상처이므로 다가가거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더불어, 멀어지지도 않는다. 그냥 상처와 샴쌍둥이처럼 몸의 일부가 붙은 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공감하는 순간 슬픔은 전이된다. 쓸데없이 특별한 척 포즈를 잡는 사람이 아니라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말랑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받을 수 없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외부에 대해 방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격성 없는 인물들은 각자가 그어놓은 자신의 선 안에서 조심조심 움직인다. 나는 이런 이들이 어울리는 내용의 글(일요일들이라던가. 하긴 그건 폭력적 요소가 없지 않지만, 인물들의 태도 얘기다)이나 시트콤류를 좋아하기에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상처를 직시하는 시선들도 좋았고.
  더불어 사람을 규정하고 정체성을 찾는 일. 이름을 붙이는 일이 함의하는 폭력성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그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서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나, 그것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몇 가지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국가, 부모, 지역, 성별 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그리고 그 위에 후천적인 어떤 것들을 쌓아나간다. 신념이나 취향, 성적인 정체성인 경우도 있고. 그 과정을 제대로 겪지 못하면 기형적인 모습을 갖는 거고.

  다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말한다. 욕망도 강하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싶어하기에 심리테스트를 재미있게 하는거고, 자신의 글에 달리는 덧글이나 싸이 방명록을 들락거리는 거다. 그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고... 결국 그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이도 그리 많지 않다.


  여튼 책을 쥔 후 순식간에 읽어치웠다. 요새 재밌는 소설 없냐, 는 질문을 들으면 한동안 대답으로 들이밀 생각이다. 어쨌든 에쿠니가오리보다는 구효서가 삼백 오십배쯤 나은 것 같다.



  경계를 짓고 굳이 이름을 붙이고 그럴 필요 있어요? 나는 쓰쓰이의 작은 방에 가득한 이름 없는 물건들을 떠올렸다. 한국인 일본인 아이누인이라고 각각 이름을 붙이면 구별하는 건 쉽겠죠. 하지만 그때부터 차별이 시작되잖아요. 쓰쓰이에게 자꾸 너는 아이누다 너는 아이누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그 친군 제 입으로 한 번도 아이누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스물세 살의, 넥스트 도어의 훌륭한, 요리사에요.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도 아니죠. 우리 누구도 그를 주방장, 주방장이란 이름으로 부르지 않잖아요. 그가 원치 않아요. 그는 주방장이지만 훨씬 그 이상일 테니까요. 이름 짓는 거, 필요하겠지만 위험하고 불온해. 특히 이 일본에서는. 하루라도 남을 차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게 일본인인 것 같다. 이게 내가 일본인이라는 이름에서 떠올리는 인상이라면 일본 사람들 아주 많이 불쾌하겠죠? 차별하는 거, 그거 따지고 보면 겁나고 두렵고 비겁해서 그러는 거라면 더 기분 나빠하려나? 조화라는 걸 강요하면서 튀는 사람을 조지는 건, 정작 나서야 할 때마저도 나서지 못하는 나약함을 정당화하려는 비겁이다, 이렇게 말하면 일본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못마땅하겠죠?
  -242~243쪽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