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리2010. 4. 22. 11:58

이야기 파는 남자Sirkusdirektørens datter
요슈타인 가아더 저 / 박종대 역
이레














  자신에게 옷을 살 수 있는 무제한의 돈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돈은, 최소한 옷을 사는 데에 있어서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화수분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체형이, 최소한 자신의 눈에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치자.(완벽하다는 예는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그런 체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체형이라고 해도,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옷이 어울리는 체형은 없으므로.) 게다가 옷을 입는 것도 꽤 좋아하는 편인 당신이라면, 어떤 옷을 입을 때 안타까움은 쉽게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한 가지 전제를 덧붙인다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새 옷을 입은 당신의 모습을 보이기를 좋아하고, 세상은 한정되어 있다. 원한다면 어느 무도회장이나 학교 등의, 어느 집단 하나로 설정해도 좋다.
  그런 경우, 다시 말하지만 어떤 옷을 입을 때의 안타까움은 쉽게 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안타까움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이 옷을 입고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면 새 옷을 입을 당신을 바라볼 눈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당신을 좌절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다시 말하지만 옷을 살 수 있는 무제한의 돈이 있고 당신은 끊임없이 바뀌는 새 옷을 입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즐거움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니까 내가 나이가 먹을 수록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일이 줄어들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책을 읽으면서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책을 읽고 다른 책을 고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전엔, 이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미 내가 파고들어간 어떤 세계의 종말이(혹은 완결이) 가까워진다는 신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책장이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던 책은 예를들어 요슈타인 가아더의 카드의 비밀, 펄 벅의 대지, 에다 유우리의 우오즈미 시리즈, 에밀 졸라의 나나,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 같은 책이었다. 대부분 분량이 많고(다시 말해 내가 그 세계에 몰입할 충분할 시간을 주었고) 분명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어느 책인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겠냐만, 좀 성기게 짜인 세계의 경우는 깊이 몰입하기보다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 혹은 디테일을 바라볼 때 좀 먼 시각을 갖게 된다.

  대학 도서관은, 적어도 내가 다녔던 대학의 도서관은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장서가 엄청나게 방대하거나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직 내가 읽지 못한 재미있는 책들이 있고, 흥미로운 책을 신청하면 좀 늦지만 도착하기도 하며, 결정적으로 경쟁자가 많지 않아 보려고 들면 충분히 볼 수 있다. 한 번에 다섯 권을 빌릴 수 있고, 캠퍼스 두 곳을 오가니까 열 권의 책을 빌릴 수 있는 셈이다. '읽어 치운다'고 해도, 하루종일 책만 볼 수는 없고 그러므로 충분하다. 사실 졸업을 앞두고 가장 아쉬운 것은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보통의 공공도서관에 비해 연당 사들이는 책도 많으며 예대, 음대 등을 끼고 있으므로 예술 관련 장서도 많이 갖고 있고.

  여튼, 새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상징(다시 살펴보니 완벽하게 관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을 떠올린 것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이야기 파는 남자'를 읽다가였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는, 그 뒤에 다른 세계가 있지만 (설령 그 세계가 이 세계에 맞먹는, 흥미로운 것이고 사랑스럽더라도!) 어쨌든 이 세계가 줄어든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작가 지망생들은 종종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작가 구호소가 자신들의 출세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정말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괜찮은 소설 모티프만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글이 써질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허무맹랑한 믿음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만으로는 소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교하고 탄탄한 줄거리만으로도 안된다. 소설 하나가 완성되기 위해선 실제로 소설을 써나갈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설득력있는 화자도 배치해야 하고, 문체의 트릭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글을 쓰면서 좌절하는 것은 이런 식의 글쓰기 기교와 요령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12년간의 학교 교육을 받은 뒤에도 글쓰기를 아직 익히지 못했다면 글쓰기 학원에 등록해서 배울 수도 있다. 글쓰기 학원은 허다하고, 글쓰기 수요도 엄청나다. 반면에 쓸 거리는 귀하다. 그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만들려고 해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나타났다. 이러한 공백이 바로 내가 노리는 틈새시장이다.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가령 삶의 경험처럼 작가가 되려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가 부족한 이들이 많았다. 먼저 글을 쓴 뒤에 세상을 경험해도 된다는 믿음은 포스트모던적인 오해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작가의 삶을 살기위해 작가가 되고자 한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작가가 되려면 먼저 세상을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도 그에 대한 결정은 삶 자체가 내린다. 글이 삶의 결실이지, 삶이 글의 결실은 아닌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 이야기 파는 남자, 이레, 200~201쪽


  우선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위와 같은 형태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성찰하는 부분이다. 가아더는, 이전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깊고 예리한 성찰을 갖고 있다. 예를들어 '대체로 깊은 절망감을 직접 맛 본 사람이 타인을 위로하기 한결 쉬운법이다.' 같은.
  근본적으로 가아더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 읽을 수 있듯,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찰이나 사상을 쓰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이건 쉬운 것 같지만 꽤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꾼인 동시에 깊이 성찰하는 사람은, 정확히는 그런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내용이다. 페테르는 어릴 때 부터 넘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 이야기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한 가지 소설에 진득하니 몰입해 쓰지 못하는 그(소설가란 장시간, 때로는 몇 년씩, 하나의 사건에만 집중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에게는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편향적이고, 너무 현실 도피적인 일이었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에게 팔아 넘긴다. 거미줄을 자아내는 거미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뽑아내며.

 

  한 가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 역시 재능이다. 페테르는 자신이 하나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낭비라고 여기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몇 년 동안 한 가지 이야기에 진득하게 몰입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 역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 중 하나를 진득하니 앉아서 써나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소설창작방법론 첫 시간에 ㅇㄷㅎ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성급한 목표의식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졸업 때까지 등단할 것 혹은 몇 년 내로 등단할 것, 유명한 작가가 될 것 이런 식의 목표의식을 버리라는 말이었다. 성급한 목표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삶은 더 지옥이 된다. 목표의식은 삶을 도구화시키게 된다.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은 이십년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는 십여년 이상을 진득하니 앉아 쓰지 않았던가. 느긋한 마음으로, 뜨거운 신념을 갖고 확신있게. 당시의 내게 와닿는 말이었다. '투철한 자기 확신을 갖고'







  초등학교 4학년의 내가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느꼈던 분노와 좌절을 기억한다.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명백한 살의를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가 잘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면엔 이런 것이 있었다. 길고 긴 이야기를 쓰고, 여러 가지 세계(벨로캉과 알쏭달쏭 함정퀴즈의 라미레 부인이라던지, 지하 공동체 등의)를 진득하니 엮어내는 그것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전의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견고하고 깊던(물론 분량의 문제도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계에 대한 충격이었다. 아마 인식하는 한 최초의 충격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깊어진 상태에서 읽었다면 그렇게 순수하고 격한 감정을 느끼진 않았으리라.

  처음 책을 덮었을 때는 어린 시절의 페테르와 어린 시절의 나(세상 모든 것을 내 방식대로 상상해서 바꿔나가던)에 대해 생각했었다. 만약 내가 그 상상의 세계에 좀 더 탐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세계로 옮겨서 표현하려는 욕구가, 즉, 작가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던 나(이 책에서는 그 부분도 언급한다. 작가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틀렸다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생각한 것을 토대로 써나가야 한다고)를 떠올려보면 더 깊은 곳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드라마라는 최근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Drama. 물론, 비단 TV 드라마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 드라마는 일상에 내던지는 어떤 형태의 균열이며 때로는 인생 전체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가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 견고하게 짜여진 하나의 세계가 될 때, 내가 아는 한 가장 완전한 형태가 된다. 무수하게 떠다니는 이야기와 플롯들 사이에서 한 가지를 쥐고 앉아서 써나가야한다. 확신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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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요슈타인 가아더는 실제로 만나면 정말 재미없는 사람일 것 같다. 엄청나게.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