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리2010. 4. 5. 13:00


검은 마법과 쿠페빵永遠の出口

모리 에토森繪都 저 / 박미옥 역

휴먼앤북스Human&Books










 

 

  영원히.

  평생 동안.

  죽을 때까지.

  언니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봤다는 안타까움과 싸웠다. 그러나 나는 늘 싸움에서 패배했고,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을 진귀한 우표, 진짜랑 똑같이 닮은 가짜 미토고몬, 사이토의 노래 때문에 울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소중히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싶은데, 이 세상에는 내 눈이 닿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내 눈이 닿을 수 있었는데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에 안타까워하는 사이,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거꾸로 보자면 그것은 내가 그만큼 세상을 좁게 보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 세상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마음에 남길 수 있는 것들은 극히 한정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10p



  “있잖아, 아까 먹은 푸딩, 진짜 맛있었다. 유들유들 보드라운데 귤 알갱이가 속속 박혀있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본다고 엄마도 그러시더라. 근데 노리코는 영원히 못 먹네, 아까워서 어떻게 하니?”

  “그렇네.”

  “평생, 죽을 때까지 먹을 수 없을 텐데.”

  “그래, 그렇겠네.”

  언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얼렁뚱땅 마음에도 없는 대꾸를 했다. 처음에는 공연히 열을 바짝 올리던 언니도 서서히 기세가 꺾이더니, 급기야는 풀이 죽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내 방을 나갔다.

  “푸딩은 아직 내일 냉장고에 남아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라도 먹으렴.”

  진심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 때 이미 푸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영원’도 ‘일생의 단 한 번’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36p




  ‘창가의 토토’라던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혹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등의, 여자 소녀 화자를 가진 작품은 내게 30점은 먹고 들어간다. 내게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은 비교적 소통이 쉬우며, 이해도 편하다. 아직 어린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겠지만.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 ‘30점은 먹고 들어간’ 책이었다. 물론 노리코라는 인물은 토토나 박완서 자신, 앵무새 죽이기의 스카웃에 비해 훨씬 공감대가 적은 인물이긴 했지만 그것을 상쇄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대학시절 들었던 소설 수업의 테마는, ‘자기 드러내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소설쓰기였다. 자신이 겪고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소설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글들의 한계는 어지간해서는 경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픽션도 현실의 디테일 한두줄보다 견고하기 힘들며, 그런 이유로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상처를 써 와서 크게 칭찬받은 친구들의 경우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설로 고쳐오는 경우 제대로 소설화되지 못했다거나, 훨씬 질이 떨어진다거나, 논픽션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소설의 경우도 픽션보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느 정도 가공한 논픽션의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소설이 그만큼 견고하게 ‘화자의 어린 시절이라고 뻥을 치는’것이지 진짜 화자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자신의 구질구질한 부분을 드러내는 데 겁이 없다’는 것과 ‘필요이상의 자기 비하나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와, 내가 이 작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멋모르고 읽었던 초등학교 시절, 최소한 중후반까지는 그 소설을 픽션이라고 믿었으니까. 그건 내가 어렸고 그 무렵의 내 세계에서는 모든 이야기들이 픽션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결정적으로 그 소설의 인물들이 이리저리 잘 안배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순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일기처럼 부산하게 자신은 잘 알 수 있지만 타인은 모를 이야기를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논픽션을 적어내는 이들의 큰 실수 중 하나기도 하고. 그런데 박완서는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건너뛰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해서 축 늘어지지도 않았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천부적 자질을 타고났기 때문이리라.

  여튼, 이 작가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부분을 드러내는 데 겁이 없으며 필요이상의 자기비하나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부 내가 취약한 부분이다.


  “이곳은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많으니까, 점원도 설교를 정말 잘하네. 점장이 오면 교복만 보고도 우리 학교가 어딘지 금방 알아차릴 거야. 그러니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학교에 통보할 거라고 할 거란 말이지. 그렇게 되면 방법이 없으니까.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자. 학교에 알려지면 어차피 집에도 연락이 가게 되니까.”

  둘만 남게 되자, 히로는 빠른 말로 내게 지시를 내렸다.

  “물건 훔치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우발적으로 해버렸습니다, 이 정도로 해두는 거야. 학교에서 친구랑 싸웠다든지,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았다든지, 반 친구 돈이 없어진 게 나 때문이라고 했다든지. 이것저것 물어 피곤해지면 우는 시늉을 해서 좀 쉬자고.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살짝 들썩거리면 우는 것처럼 보이니까. 참, 노리코, 너 담배 갖고 있니?”

  “갖고 있어.”

  교복 코트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 히로는 그것을 구석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발로 꾹꾹 눌러 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좋아, 퍼팩트!”

  나는 솜씨 좋게 일을 처리하는 히로에게 감탄했다.


                              (……)


  두 장에 500엔 하는 도시락보 따위를.

  네 켤레에 천 엔 하는 양말을.

  바나나 향이 나는 립글로스를.

  어차피 붙잡힐 것이었다면 좀더 폼 나는 것으로 훔쳤으면 좋았을 것을.

  최소한 실크 스카프라든지 레이스가 달린 손가방이나 장미 향수 따위를. 이 아이들은 화려한 세계를 동경했다고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목적이 확실히 전해지는 그런 것들을.

  “쓸데없는 일이야.”  

  그때 옆에서 히로가 중얼거렸다. 

 “뭐랄까, 허망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확실히!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훔치는 일이 허사라면, 그래서 우리를 붙잡아 소란을 피우는 일도 허사다. 빨간 앞치마의 입에서 튀는 침도 설교도 모두가 허사다. 우리 부모님이 울든 화를 내든 그것도 허사이고, 히로 부모님의 휴머니즘도 어쩜 허사이리라. 밤늦게까지 노는 일도, 겉으로만 친구인 척하는 교우관계도……. 열네 살의 나는 쓸데없는 일투성이였다.

  “울어봤자 허사야.”

  히로의 속삭임으로 나는 자신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니가 귀엽대.”

  “누가?”

  “야스다가 니가 귀엽대.”

  “뭐? 누구라고?”

  “야스다. 야스다 켄이치. 아까 같이 있었잖아? 어떤 앤지 보고 싶냐니까, 약간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데리고 온 거야.”

  야스다 켄이치.

  먼 이국땅의 강 이름을 암송하듯이 나는 그 발음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봐도 그 이름은 여전히 먼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던 사람은 야스다 아츠시였으니까.

  “야스다…… 켄이치.”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은 그 이름을 듣고, 나는 그저 멍하니 도시락 뚜껑을 내려다보았다.


(……)


  야스다 아츠시는 키도 크고 잘생긴데다가 축구부 에이스이고,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으며, 패션 감각도 훌륭한 빛나는 1반의 태양이었지만, 성격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더럽고,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지저분한데다가 야스다 아츠시 때문에 눈물을 흘린 여자들은 아수라의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설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속으로 그리던 사람을 그렇게 쉽게 바꿔치기 할 수 있는 걸까?

  같은 야스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쉽게 교체 가능한 것일까?

  주위로부터 의견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왠지 모르게 고집스러워졌다. 야스다 아츠시를 두둔하고 싶어졌고, 야스다 켄이치를 멀리하고 싶어졌다. 가능하면 야스다 켄이치와 스칠 때도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야스다 켄이치가 있는 느낌이 들 때마다 발길을 홱 돌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야스다 켄이치의 시선은 나를 쫓아왔고, 사람이 뒤바뀐 것도 모르는 채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도 가나이가 전해주었던 한마디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노리코, 야스다가 니가 귀엽대.

-285~289p



  같은 시기, 소설 창작 수업 시간에 나온 이야기였는데 ‘어린 화자를 쓸 경우, 어른들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날카롭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시키고 상징적으로 드러내기에 쉬운 것은 어린 아이들의 또래 집단이다. 특히 학교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어떤 곳보다 한국이나 일본의 학교(다른 아시아계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읽은 적이 적다)가 훨씬 더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세상은 거시서사보다는 미시서사를 담론화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고, 소설 역시 커다랗고 대단한 이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작은 것들 혹은 개인적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나 역시 그 쪽이 더 취향에 맞고.


  한동안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적어도 내 아이가 읽을 책은 손수 골라 책꽂이에 꽂아주고 싶었는데, 로알드 달의 동화처럼 신랄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혀주고 싶었다. 교훈적인 내용이나 위인전은 내던져버리고. 태백산맥-아리랑처럼 한 시대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을 읽혀 균형된 시각을 잡아주고도 싶었고, 감각적인 시집을 읽히고 철학책을 보며 세상에 대해 고민할 기회도 주고 싶었다. 이 책 역시, 아이가 있다면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환상을 걷어낸 세상’을 보여주는 데 부합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나 세상을 단순화시키는 착각이 없이 약간은 신랄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크길 원했기 때문이다.

  나를 닮은 아이라면, 이 책을 읽는다고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느정도의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넘어짐조차 없이 안전하게 가는 인생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