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2010. 5. 25. 08:00

  도대체 뭐가 더럽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B단조 미사 전곡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나중에 알았다. 2006년에 LG 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 한국에 없었다... 한국이었어도 내게 바흐가 그만큼 어필하지 않았으니 아마 안갔겠지만. 바흐 음악을 많이 듣지만 대부분 챔발로 곡들 한정이다. 피아노보다 챔발로 소리가 더 좋거든. 아, 챔발로 공연하는 거 직접 보고 싶네.
  어쨌든 B단조 미사를 특히 좋아한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키리에Kyrie가 좋다.

  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의미다.

  키리에를 듣고 있으면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내 경우, 음악은 굉장히 즉각적인 감정 변화를 가지고 오는 매체인데, 이를테면 사진이나 그림 혹은 문학 등의 타 장르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다. 가장 빠른 시간에 사람을 지배하고 그 효과가 꽤 길다. 특히 어릴 때는 같은 음악을 되풀이해서 듣고 있으면 그 음악을 따라서 내 감정의 고저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종교곡이나 종교화는 좋아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요한의 목을 자르는 살로메라던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던지.
  무수한 유디트를 보았지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를 가장 좋아한다.



출 처 : www.artemisia-gentileschi.com
나폴리 버전. 이거 말고도 이 시리즈가 다섯 점 더 있다.



  오른쪽에 목을 베는 여자가 유디트. 왼쪽은 하녀.
  원래도 좋아하는 화가고 그림이지만, 민음사에서 나온 책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를 읽고 나서 그 애정이 배가되었다. 나폴리의 Capolodimonte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들를 일이 있으면 한 번 보러가고 싶다.

  대충 얘기하자면 이렇다. 아르테미시아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여자 화가인데, 화가의 딸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그러던 그녀를, 아버지의 친구였던 타시가 꼬드겨서 자는데 이 남자가 유부남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혼인빙자 간음 정도.(게다가 처음에는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여 성립한 강간이었으니, 더욱 용서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고소한다. 로마 최초의 성폭행 고소였으므로 시끄러워졌고, 그 와중에 고문도 당하고 이런저런 고초를 겪으나 결국 승소한다. 그리고 상대방은 (고작) 8개월 금고. 게다가 아르테미시아는 남자를 유혹했다는 죄목으로 1년간 감옥에 간다. 그 이후 그린 그림이 저 것인데, 목을 베이는 남자가 문제의 타시이고 목을 베는 여자가 아르테미시아다. 이 그림이 다른 그림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면,


Judith Victorious - Lucas Cranach The Elder 作
이런 식으로 목만 갖고 있다(우선 자르는 장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Judith - Climt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 유디트를 '환희에 찬' 모습으로 그려서 좀 말이 많았지만...
너무 최근작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언급할 순 없겠지.




Judith Beheading Holofernes - Caravaggio 作
혹은 이런 식의 표정.




  카라바조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죽어가는이었나, 또 가물가물) 장면을 보고 받은 인상을 갖고 그렸다고 한다.(실제로 카라바조는 자기 애인이나 죽은 창녀를 마리아로 그리기도 하고, 여튼 종교화 치고 되게 디테일하다. 카라바조 그림도 좋던데 난)
  여튼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그림의 인물의 표정은 굉장히 결단에 차 있다. 망설임없이 목을 베어버린다. 이전에 나왔던 유디트들이 대부분 겁에 질려있는 여자거나, 자른 후 나오는 길(한쪽에 목이 그려져있다) 일색인 반면 여기서는 대담하게 목을 벤다. 카라바조의 인물이 미간을 찌푸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자세히 보면, 혐오감? 역겨움을 참은 얼굴 표정이 있다. 피하지 않고 맞서야 하는 일이긴 한데 싫다...는 느낌. 난 카라바조보다는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쪽이 더 현실감이 있는 것 같다.
  시대를 감안했을 때,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엄청난 복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여기서 자기자신이 '더럽다'는 인식은 없잖아?



  요새는, 강간죄로 고소한다고 해서 '유혹한 죄'로 감옥을 가지 않는다. 그게 그르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려는 페티시를 경계한다. 불행 페티시는 정말 무섭다. 그건 사람의 움직임을 막아두고 고착화시키며 옴쭉달싹 할 수 없게 한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 피해자의 위치에 치환하며 움츠리기 시작하면 이후에 몸을 펴기가 힘들어진다. 실제로 자신이 아프고 괴로운 일을 객관적으로 나열할 수 없다면, 그건 화를 내거나 불행하다고 여길만한 일은 아니다. 이런 형태의 불행 페티시 중에서도 정말 징그러운 것이 술집 여자 혹은 창녀 페티시이다. 뭐 2차 안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심플하게 몸 파는 사람이라고 하자.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별들의 고향'의 경아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마인드 말이다. 실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런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진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창작하는 형태의 창작물 얘기다.

  요런 클리셰들이 많더라.
1. 가난하다(or 순진한데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해서 인생 망쳐졌다.)
2. 몸을 파는 것은 더럽다.(그러나 인물의 마인드는 깨끗하다.)
3. 건조하고 말이 없는 성격의, 생기가 빠진 주인공.

  아 심한 경우는 이런 것도 있다. 강간당했다고 '몸을 버렸으니'하는 이유로 술집에 간다. 뭐 이건... 한 번 매를 맞은 다음에 '이미 버린 몸이니'하고 매를 맞으러 가는거야?...

  나 빼먹은 거 있나? 꽤 많은 소설, 영화 같은 곳에서 저런 걸 접했는데 접할 때마다 이미지의 힘은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 실제로 집안 가족들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있어서 몸을 파는 사람들도 있긴 있겠지만 그건 소수고. 보통은 쉽게 돈 벌기 시작하면 그 길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던데.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저 더럽다는 인식 하에 괴로워하고, 상대방은 비난한다. 이쯤 되면 '넌 참 깨끗해'나 '너의 사랑이 나를 깨끗하게 해' 블라블라...
  이런 식의 인식이 되게 낡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주 눈에 띄더라고. 영화나 소설이나 팬픽 등에서 자주 눈에 띄는데... 이런 것들을 접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특히 이런 부분,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스스로가 더럽다고 되뇌이거나 상대방이 너 더러워라고 말하는 부분. 나 더러워 아니야 너는 더럽지 않아... 아 지겨워.




  애초에 성폭력 피해자들이 큰 수치심을 가지고 사는 이유 자체를 생각해보면 갑갑하다. 물론 그 상황에서 폭력적으로 당했다는 문제도 있겠지만 인식의 힘이 크다. 여자가 '그런'일을(아, 이 경우는 남자 포함. 약하고 힘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쓰자)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불쌍하게 여기는 동시에 더럽다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지금이 환향녀 소리하는 시대냐. 생각해보면 병자호란 때 나라 못 지켜서 끌려간 것도 억울한데, 수절을 못했다고 더러운 환향녀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도 참 불쌍하고.
  게다가 이 인식은 굉장히 이중적이다. 남자가 이 여자 저 여자랑 자고 돌아다니면 능력 있는 거고, 여자가 그러면 걸레다.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중고생을 보면 한 다섯배쯤 갑갑해지는데(저 어린 것들마저 저런 담론에 얽혀있다니 이 병신같은... 이란 느낌.), 이런 식의 담론이 형성되는 것은 성을 말하는 포즈가 계속 쉬쉬하고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형태의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을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소중하고 소중하게 두었다가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올바르다는 통념이 있다. 근데 이게 되게 사회적이고, 사회의 규범에 따라 가변적으로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이 '소중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가족 제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근데 가족제도가 깨지고 있다. 다들 이혼하잖아? 참고 살지 않으며, 편모나 편부 가정이라던가 동성애 가정 혹은 아이를 갖지 않는 가정 등이 생긴다. 게다가 성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서, 사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에게 아껴두었다 준다'가 색이 바랜지 오래라고. 근데 이런 시점에서도 아직도 그놈의 '더러워' 소리가 나온다는 게 기가막힌다는 거다.

  이성애적 관계 외에 동성애적 관계에서도, 삽입 성교만 놓고 얘기를 하자면 삽입을 하는 쪽은 '더럽다'라는 단어에서 더 자유롭다. 삽입을 당하는 쪽에다가 대고 '더럽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 남성-여성의 성교를 놓고 보았을 때 삽입을 하는 쪽이 남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결국 여자가 불리하게 만들어진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남자를 다 죽여버려야 해, 라던가 모든 여자는 피해자라던가 하는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여기에 군가산점과 군대와 꼴페미와 된장녀와 또 뭐 있지? 아 그래 임신과 출산에 관련한 덧글이 달리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덧붙이자면 이야기의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냥 덧글 안 달았으면 좋겠다. 이 글 뿐 아니라 모든 게시물에) 다만 이런 식으로 성을 인식하는 것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르테미시아가 목에 칼 들이대고 확 잘라버린(그림을 그린) 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편견을 갖고 사는가.



  그래서 강간을 당한 사람이 괜찮아,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신체적-정신적 피해 이외에 '인식적'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인식이 글러먹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술집 여성을 위시한 여성의 성교에 대해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 없이 쾌락을 위해서 혹은 돈을 벌 목적으로 혹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 벌어지는 모든 형태가 다 그저 성교이고 교미라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가자고. 그리고, 까놓고, 잠은 여자 혼자 자니?
  그리하여, 제발 그 소리 좀 안했으면 좋겠다. 더럽혀지고 깨끗하다는 것. 이것이 되풀이된 인식의 결과물이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물론 폭력에 노출되었으니 그것에 대한 상처는 있겠지만, 그 상처로 인해서 자신을 버리는 인식을 갖지 말자고. 강간 후의 그 무수한 상처의 큰 부분이, 아까부터 말하고 있는 '더럽다'는 인식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놈의 걸레 소리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소리다. 남이 다른 사람이랑 자거나 말거나, 그게 왜 걸레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틀에 박힌, 이미 이미지로 학습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뻔한 몸 파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진부하기까지 하다고. '술집 여자'라는 말이 욕이 되는 세상이니, 이 편견의 뿌리가 어디서부터인지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치만 틀린 건 틀린 거잖아.



  여자가 남자랑 자면 자기를 '준다'는 인식, 더럽다, 더럽힌다 이런 단어들이 정말 신물나게 지겹다. 하긴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자기는 무수한 여자들과 잔 걸 자랑으로 삼는 동시에 처녀와 결혼하리라고 천명하는 멍청이가 출몰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은 문제는 그 멍청이는 자기가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살고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하고 방황하다가 구원을 얻는다. 키리에 엘레이슨이니?

  강간이 정말 큰 범죄라는 글은 많이 읽었다. 살면서 정말 무수히 봤다. 몸과 정신을 죽이고 블라블라... 물론 약하고 예민한 신체부위이며 이후에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부분에서 맞는 말이다. 게다가 근친상간이(의외로) 많이 일어나고, 성범죄 가해자의 다수가 원래 아는 사이였다니 그럴 법도 하다. 자기 몸의 주체, 자기가 하고 싶고 싶지 않음을 결정할 수 없는 식의 문제로 생각하면 이건 큰 폭력이다. 다 맞는 말이고 인정한다. 위의 내 말이, 강간을 합리화시키자는 의도는 1g도 없다. 그러나 이 '맞는 부분'과 분명히 분리해서 생각해야한다. <'이미 몸을 버렸다'는 식의 자책>하고는 분리하자고. (고로, 몸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강간당해도 강간 맞다고.)

  섬세하게 세공한 은장도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 용도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더럽다고 자책하느니 차라리 칼을 들고 상대방의 목을 베어버리라고.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