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2010. 7. 10. 14:30



   종종, 학습만화 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클리셰 중에 그런 것이 있다. 과거에서 온 인물, 예를들어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등이 타임머신이나 시공간의 뒤틀림 등으로 인해 현재에 도착, 평범한 누군가가 그들과 어울려 현재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 이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오는데 하나는 과거의 인물을 친근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명징하게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각을 바꾸는 효과가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누구나 인터넷을 검색하면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는지는 알기 어렵다. 구글링이나 네이버 검색으로 맛집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 검색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처럼.

   종종, 나는 그런 상상을 한다. 과거의 인물, 예를 들어 바타이유나 빨간머리의 ANNE이나 오백년 전 세상을 살아가던 무명씨에게 지금의 삶을 설명하는 것. 내가 입고있는 옷과, 출근해서 하는 일이나, 내가 사고싶어하는 물건이라던가. 당장 내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삼박 사일은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실은, 최소한 몇 달 전에는 당연하지 않았던 경우가 허다하다. 십 년 전의 나는 미투데이를 상상했을까?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검색엔진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너무 당연하게 쓰고 행동하는 것들이 불과 몇 년 동안 익숙해진 것들임을 생각해본다. 세종대왕에게 캐안습을 설명하자면, 음, 우선 달라진 한글 환경과 인터넷과 자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지. 뭐임에서 뭥미로 변하는 것을 설명하고 캐안습의 캐가 접두사 개에서 시작하는 걸 말해줘야겠지. 안습은 안구에 습기가 차는 것이고, 그런데 대왕님은 접두사라는 단어는 아시죠?

   종종, 과거에 만났다가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난다. 현재의 일상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지금의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 그 낯선 기분은 나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간극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순간이다. 얼마 전 만났던 친구는 자연스럽게 스타벅스에 가서 프라푸치노를 먹을 것을 제안했다. 왜냐하면 그를 만났던 고3의 나는 저녁 대신 카라멜 프라푸치노를 먹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나를 기억하지만, 그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매우 다르니까. 그때에 비해 평화롭고 온화해졌다는 얘기를 듣고 잠깐 멍하니 생각했다. 아, 내가 그랬었나.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좀 더 세속적인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과거의 그라면 얘기하지 않았을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오고, 몽상가였던 그를 기억하는 나는 잠깐 당황하기도 했다.

   종종,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함을 생각한다. 당연한 것은 없지만 일상은 당연한 듯 흘러간다. 익숙해져 있으므로 아무렇잖게 넘기는 것들이, 실은 변화라는 것을 생각한다. 감정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내가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들 안에 갇혀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함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 현실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은 이들에게 지금을 설명하고자 하는 클리셰는 그래서 클리셰가 되었다. 다른 클리셰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되풀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종종, 허공을 응시한다. 얼마 전 만났던 친구는 개통한지 몇 달 되지 않은 9호선 신논현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요새 이거 타고 다녀, 라고 그가 말했다. 익숙하게 지하철을 타러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변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허공을 응시하며 지금 내가 서 있는 땅을 느끼는 것. 왜 내가 여기 서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되풀이될 것이다. 영원히 안주하지 않고, 여기는 스쳐가는 곳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하고 의심하며 살아갈 것이다. 편안함을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