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2010. 5. 24. 08:00


  인생이 재미없을 때를 대비해 어린시절, 메모한 것이 있다.

 

1. 재미없다고 포기하지 말 것. 그리고 '재미없으니 하기싫어'라는 마음가짐인 상태에서, 이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지 말 것. 왜냐하면 하기 싫은 마음에, 이유를 갖다 붙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재미없는 상태, 를 언제나 당연한 듯 생각하지 말 것. 이때를 기준으로 사고하는 게 아니라, 이게 특별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행동해야한다. 이때 결정한 것들은 대부분 '일 안 벌인다'를 향해 달리고 뭐든 그만두고 쉬겠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하면 인생은 더욱 재미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움직여야 기분도, 머리도 굴러간다.

  2. 재미없고 하기싫고 남이 왜 저렇게 낑낑 열심히 사나 싶어도, 타인에게 입대지 말 것. 예를 들어 "뭐 그렇게 아둥바둥 해서 달라지는 게 있니?" 이런 소리. 남 열심히 사는 데 감히 한 마디 할 자격 없다는 거 명심할 것.
  -남 인생까지 재미없게 만들 자격은 없다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의적인 문제는 당연한 거고, 전혀 안 멋있다. 인생 달라지는 게 있는지 남는 게 있는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 재미 없다는 거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면 멋있는 줄 아는 사람들(특히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남자들 중 많다)을 생각할 것. 추접하다. 자기 인생 재미없다고 남한테 짜증 내고 신경질 내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는 거 재미없는 거, 쉽지 않은 거, 남는 거 없는 거 남들은 이미 옛날에 다 알던 거다. 이제야 겨우 알아놓고 유레카 외치며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꼴이다. 이미 수천년 전 남들이 다 깨달았던 문제 갖고 설치지 말자.

  3. 사는 거 재미없다고 사건 만들고(일 벌이고) 다니지 말 것. 나중에 수습 못하고, 인생 재미없는데 심지어 갑갑하게 된다.
  -연애가 삶을 나아지게 만든다는 건 착각. 물론 그 감정이라는 부분이 단기간에 사람을 바꾸는 부분은 크지만, 헐리우드 영화 빼고 누구 절실히 필요할 때 괜찮은 사람 나타나는 경우 없다. 배고플 때 마트 가면 음식 많이 사는 것과 같은 이치. 괜히 쓸데없는 거 사게 된다. 나중에 이거 수습하다보면 인생 더 재미없어진다.
  물론 '사건 만들고'는 연애 등의 인간관계만 포함하지 않는다. 생각 없이 덥썩 뭐 배운다던가, 장사한다던가, 누구랑 매일 산책을 한다던가 이런 거 저지르면 골치 아프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제일 수습하기 어렵다.

  4. (나처럼) 재미없어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도망갈 것.
  -그러나 나는 지키지 못했다. 이 메모를 할 때 내게 조언해 준 친구도  못 지켰는 걸. 왜냐하면 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타인의 천진난만함은 굉장히 거슬리기 때문이다.
 
  5. 어깃장 놓지 말 것.
  -특히 자기 인생 갖고 어깃장 놓지 말 것.
  똑같이 살면서도 고민할 수 있다. 삼일 재미 없었다고 팡파레 울리면서 말기 암 환자처럼 인생 정리하지 말 것.

  6. 남 탓하지 말 것.
  -자기 부모, 학교 다닐 때 괴롭힌 인간 누구누구누구누구, 학교 선배, 직장 상사, 전 여자친구, 동생 등등.
 '내가 얼마나 병신인가'를 증명할 방법은 그 외에도 무수하다.


  내 인생 재미없다고 해서 꼴사납게 굴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생기는 건 아니다. 심지어 꼴사나운 모습 보이는 사람들 중 인생이 언제나 재미 없는 것도 아니더라.

  사실 나 역시, 다 지켰는지는 좀 의문이다. 하지만 삶이 재미없고 색채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늘 되짚어 읽어보곤 한다.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