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리2010. 4. 18. 21:00

함구Bouche Cousue

마자린 팽조 저/최연순 역

빗살무늬














  비밀은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단지 재미만을 느끼기에는 나는 비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벽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벽들은 내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내 육체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전부 말하고 싶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건망증. 나는 아무래도 건망증에 걸린 것 같다. 늘 건망증에 걸려 있던 것 같다. 열정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기억이 없고, 강렬한 순간도, 상징적인 순간도 나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모든 중요한 순간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하고 있고, 그 순간이 나의 아버지를 더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나는 어린 시절, 냄새가 주는 인상들, 목소리의 변화, 산책, 웃음, 휴가,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 대한 풍경만을 가지고 있다.
함구Bouche Cousue, 마자린 팽조, 빗살무늬, 29쪽




  비밀은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단지 재미만을 느끼기에는 나는 비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벽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벽들은 내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내 육체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119쪽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다. 당신의 그 넘치는 신중성 앞에서, 조용한 미소 앞에서, 나에 대해 말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렇게 사랑받고 싶다. 숨겨진 아이, 그러나 사랑받는 아이인 나는 자부심을 갖고 싶다.
당신의 사랑을 무기처럼, 영광처럼 흔들고 싶다. 모두가 갈망하는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응석받이 아이로, 약간 심술궂은 사람으로,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거만한 사람으로 나를 보여주고 싶다. 이 사랑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된다는 두려움에 더 이상 떨고 싶지 않다. 당신이 여기 내 옆에 있었으며, 당신 보란 듯이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내 옆에 있었으면. 가끔 그들을 죽여주었으면. 당신 앞에서 그들이 파리로, 애벌레로 변해버렸으면 좋겠다. 당신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말하기를, 이애는 내 딸이야. 그 애를 아프게 하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들이 두려움에 떨기를, 맞추어 입은 바지 속에 비겁함이라는 소변을 내보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 순진무구한 존재인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용서를 베푼다. 나의 격분은 당신의 시선 속에 담긴 분노 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분노도 나의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낼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노여움 그 자체가 아니고서는 나는 화를 낼 능력이 없다.
235쪽




  가끔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전혀 다른 체험을 겪은 사람의 증언이 겹칠 수 있는가. 왜 저 문장들이 내 살갖 위에서 흔적도 없이 스며드는가. 도대체 왜 내가 지하철에서 뜬금없이, 왈칵 터지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어야 하는가. 왜 어린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일들에 입도 열지 못하고 울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와중에 통증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를 부정해야하는가.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되면, 완전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예전이라면 이렇게 적어놓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게 되면, 삶이 조금 더 슬퍼질 것 같다. 혹은 조금 더 덤덤해지겠지.

  많이 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도 전부 말하고 싶다.



+

  마자린 팽조Mazarine Pingeot : 프랑스의 테랑Franois Maurice Marie Mitterrand 대통령이 큐레이터 안 팽조Anne Pingeot와의 혼외정사로 낳은 자식.
  스무 살까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지 못하고 자랐다. 하지만 미테랑은 자신의 법적인 부인 다니엘보다는 안과 마자린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시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미테랑은 사실이 밝혀진 이후 말년에 딸에게 자신의 자산 관리를 부탁했을 정도. 

  이후 1996년에 파리마치에서 파파라치가 터뜨렸는데(스무 살의 딸이 있다고) 오히려 프랑스 국민들은 잡지를 비난했다. 그건 대통령의 사생활일 뿐이라고. 프랑스에서 정치인의 사생활은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 사르코지는 유부남이면서, 남의 아내에게 12년을 구애해 결혼하지 않았는가. 사르코지는 심지어, 아내랑 서로 맞바람을 피운 후 TV에서 "다른 가족처럼 우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98년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을 두고 "수준 낮은 문화의 마녀 사냥"이라고 했으니까.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