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0. 3. 30. 10:56

첫사랑Anne 3 (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3권)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저 /김유경 역
동서문화사


  "어머나, 나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은걸요. 그렇게 하면 거의 언제나 굉장히 불안한 마음이 될거예요."


  우리에게는 '빨간머리 앤'으로 유명한, ANNE 시리즈는 총 10권으로 출간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정말 ANNE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총 8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소녀 앤의 이야기는 1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서툰 앤은 2권, 3권에서는 대학에 다니면서 길버트와 속터지게 밀고 당긴다. 사실 9권과 10권은 그녀의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총 8권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이 중에서 대학을 다니는 3권에 아주 잠깐, 루비 길리스의 죽음이 소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앤은 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잠깐잠깐 집에 들리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루비 길리스는 '예쁘고 질투도 나지만 얄밉고 속물인 애' 정도로 몇 번 언급될 따름이니까.
  하지만 이 3권을 읽으며 내가 가장 집중한 부분은 루비 길리스의 죽음이다.


  앤이 루비 길리스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녀의 죽음 때문이다. 레드먼드 대학에 입학한 앤이 방학을 맞아 돌아갔을 때, 루비 길리스는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급성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그리고 죽은 루비의 모습이 심도깊게 다루어 진 것은 3권에서가 유일하다. 그 전까지의 루비는 깊이 언급되지 않는데, 앤이 가까이 두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히 앤과 그 주변 인물들 위주 - 그리고 그 자식들 위주로 돌아가는(그래서 그녀의 결혼 이후 그린 게이블즈의 이야기가 적게 나오며, 이후 앤의 아이들을 다룰때는 앤의 등장이 적다) 형태이므로. 1, 2권에 등장하는 루비 길리스는 '예쁘지만 머리 빈 사람의 심볼' 정도로 언급되거나, 얄밉게 앤에게 쏘아붙이는 캐릭터 정도. 당연히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죽음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별안간 루비가 말했다.
  "달빛이 비치면 묘지는 정말 이상해 보여. 어쩌면 저토록 기분 나쁠까! 앤, 나도 이제 곧 저기 들어가는 거야. 너며 다이애너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운차게 살아가는데-나는-저기-저 오랜 묘지에- 죽어있는 거야."
  루비는 몸을 떨었다.
  너무나도 놀라 앤은 어찌할 바 모르며 한참동안 말을 못했다.
  루비가 다그쳤다.
  "그렇게 된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앤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루비, 알고 있어."
  루비는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알고 있어. 나도 알아. 항복하지 않으려 했지만 여름 내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오, 앤!"
  루비는 손을 뻗어 매달리듯 앤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게 두려워."
  앤은 조용히 물었다.
  "왜 두려워하니, 루비?"
  "왜냐하면-왜냐하면- 아, 천국에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야, 앤. 나는 교회임원인걸. 하지만-모든 것이 너무도 달라져버리잖아. 나는 틀림없이-틀림없이 굉장히 무서워하고-그리고-그리고-향수병에 걸리고 말 거야. 물론 천국은 무척 아름다울 거야. 성경에 그렇게 씌어 있는걸-하지만 앤, 천국이란 지금까지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곳이잖아."

(중략)

  천국은 루비가 지금까지 살았던 곳과 같을 수 없다. 지금까지 발랄하고 즐겁게 살아온 루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높은 이상을 품은 적도 없었던 루비는 그 커다란 변화를 감당할 만한 힘이 없는 것이다. 내세니 하는 것은 그녀에게 지금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믿을 수 없는 정도로 따분한 곳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ANNE 3권 첫사랑, 루시 모드 몽고메리, 동서문화사, 158-159쪽)




  루비 길리스는 남자에게 어필하고 칭송을 받는 것이 삶의 목표다. 그녀의 집안 분위기 자체가 그렇다. 그것에서 삶의 덧없음을 읽어낸 앤은 분명히 괜찮은 감수성과 깊이를 지닌 아이고 그래서 종교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도 거부감 없이 읽힌다.

  3권에 등장하는 또 다른 캐릭터, 필리퍼 고든이 있다. 앤의 대학 친구다.


  "한 사람도 없어. 매주 두 사람에게 편지로 여기서의 내 남자친구들에 대해 모두 써보내. 틀림없이 두 사람 다 재미있어하리라고 생각해.
  물론 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에 잡히지 않아. 길버트 블라이스는 나 같은 건 마음에도 두지 않고, 나를 다만 귀여운 아기고양이로 쓰다듬어주고 싶어하는 듯한 눈으로 볼 뿐이야.
  그 까닭을 나는 알고 있어. 나는 네가 원망스러워, 앤 여왕님. 정말은 너를 미워해야만 하는데도 나는 미칠 듯이 네가 좋아. 날마다 너를 만나지 못하면 우울해져. 너는 이제까지 내가 알았던 어떤 사람과도 달라. 넌 사람을 보는 눈이 독특해.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나는 어쩌면 이토록 하찮고 시시한 인간일까 하는 기분이 들어 좀더 착하고 현명하고 강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 그리고 훌륭한 결심을 굳게 하지만, 멋진 젊은이가 내 앞에 나타나기가 무섭게 모처럼 다진 굳은 결심도 머리에서 내동댕이쳐지고 만단다.
  대학생활이란 멋있잖아? 첫날 아주 싫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스워져.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너와 진짜 친구가 되지 못했을지도 몰라. 앤, 부탁이니 다시 한 번만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가 좋다고 말해주면 안돼? 그 말을 듣고싶어 견딜 수가 없어."
  앤은 웃었다.(62, 63쪽)


  이런 필리퍼 고든을 처음 만났을 때의 앤과 그녀의 친구 프리실러의 평이 있다.


  "나는 좋아. 그렇게 쓸데없는 말만 지껄여대는데도 어딘지 몹시 마음을 끄는 데가 있어. 자기도 말했듯 그녀는 입으로 말하는 절반도 바보스럽지 않다고 여겨. 입맞춰주고 싶어지는 귀여운 아기야. 언제까지나 진실로 어른이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해."
  프리실러는 또렷이 말했다.
  "나도 좋아. 루비 길리스 못지 않을 만큼 남자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루비의 말을 듣노라면 언제나 화가 나거나 속이 뒤집혔었는데 필의 경우는 그저 재미있고 웃음만 나와. 대체 이게 어찌딘 일일까?"
  앤은 명상에 잠기듯 말했다.
  "거기에 차이가 있어. 루비의 경우는 머리 속에 남자아이 밖에 안들어 있어서 남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게 아닐까? 연애를 장난삼아 사랑놀이를 하고 있는 거야. 게다가 루비가 자기 숭배자들을 자랑할 때는 이쪽이 그 절반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빈정거리기 위한 것처럼 들려.
  필이 숭배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냥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 들리잖니. 남자아이를 좋은 친구로 삼고 있는 거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는 것을 기뻐하는 건 다만 자기가 인기있다는 것과 있기이다고 여길 수 있는 게 좋아서일 뿐이야. 앨릭과 앨런조-이제부터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도 필에게는 단순한 놀이친구에 지나지 않고 그 두 사람 쪽에서도 한평생 놀고 싶어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48~49쪽)


  
  얼핏 보면 비슷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루비 길리스와 필리퍼 고든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태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몰입하여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루비 길리스와 자신의 삶마저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필리퍼 고든 말이다. 어찌 보면 같은 맥락에 있는 그녀들의 차이는 자신을 긍정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루비는 자신을 포장하는(이를테면 내게는 숭배자가 많다는 식의 태도로) 것이고, 필리퍼 고든은 객관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단점마저 여과없이 보이지만 긍정할 부분은 솔직하게 긍정한다. 이러한 필리퍼의 태도와 생활 방식이 긍정적으로 먹히는 것이고.

  루비는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특히 남자들에게서. 필리퍼는 찬사를 즐기지만 그 시선에는 휘둘리지 않는다.


  부잣집의 귀한 공주님인 필리퍼 고든은 스스로를 낮추고, 어린아이처럼 군다. 의도하건 그렇지 않았건 그녀의 태도는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첫 대면에서, 아름답고 부자인 그녀에게 기가 죽었던 <프리실러는 갑자기 자기 모자가 마을의 모자가게에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앤은 린드 부인에게 본을 떠 달라고 하여 자기가 직접 만든 블라우스가 이 낯선 아가씨의 세련된 차림에 비해 너무도 촌스럽고 초라해보이지 않을까 불안해졌다(49~50쪽)> 프리실러와 앤이 순식간에 마음을 풀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엉뚱함과 어리고 푼수인 부분이다.

  필리퍼 고든의 매력은 자신의 태도에서 배가된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답고, 사랑받는 부잣집의 외동딸이다. 구김살 없는 그녀의 태도는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어릴때부터 사랑받았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물론 천성적으로, 어떤 고난을 겪어도 구김살 없이 고운 느낌을 갖고 살 수는 있지만 무한정 철없이 굴지는 못한다. 타인의 미움이나 자책감에 휘둘리거나, 갈 곳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이러한 발랄함이다.






  은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1998년도에 방송했던 드라마였는데, 엄마가 꽤 좋아해서 때때로 같이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경영이 김원희와 외도하여 낳은 은실이는 조숙하고 성숙한 아이였다. 나중에 이경영의 집에 들어가서 눈칫밥을 먹으며 사는 그녀는 배다른 언니인 강혜정과 비교되었다. 철없고 제멋대로인 강혜정과 대조되는 착하고 어른스럽고 배려심 깊은 아이로.
  그러나 엄마는 은실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애가 또래답지 않게 배려심 깊은 행동을 하거나,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고 참는 부분이 나오면 혀를 끌끌하고 찼다. 그 무렵 엄마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저렇게 애늙은이 같은 애는 좀 싫더라."
  엄마는, 구김살을 갖고 큰 아이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때는 그 이면에 보이는 상처가 가슴아파서겠지 하고 넘겨버렸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사람에게도 관성의 법칙은 적용된다. 제가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고, 어리광을 부려도 누구나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럼 없는 사람은 사랑스럽다. 아무리 위장하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성격이나 살아온 모습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최근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창경궁에 놀러가서 본 아주머니의 일화.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어떤 신사와 데이트를 나온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그러나, 벤치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았다가(치마를 입은 상태에서) 무릎을 올려 앉았다가 하는 식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온 모습은 버릴 수가 없는 거야'하고, 엄마는 말했다. 그런 행동에 대한 호불호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고운 몸가짐을 배울 새가 없이 힘들게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식의 말이었다. 나 역시 공감했다.
  가난과 재채기와 짝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비단 가난과 재채기와 짝사랑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겪은 일이나 방식은 몸 어딘가에 배어, 타인으로 하여금 그런 방향으로 자신을 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랑받으며 살아온 필리퍼 고든은 여전히 어리고 귀엽고 사랑스럽게 남아있는 것이고.


  당연한듯 스스로를 하대하거나,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자학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그것이 객관성을 가져서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더 그렇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의 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따지기 전에, 보통은 그런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대하더라. 자신을 존중하지 않은 사람을 존중해주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하대받으며 살아온 한을 가진 사모님에게 접근하는 제비 정도일까. 

  자신을 비하한다 -> 그 태도가 몸에 밴다 -> 타인도 그렇게 대한다 -> 비하한다
  악순환이다.


  루비 길리스에게는 오만한 표정이 있다. 오랜 시간동안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그 표정은 죽고 나서 사라진다. 관 속의 그녀는 살아 생전보다 훨씬 아름답다. 흰 벨벳관에 담겨 죽는 루비 길리스를 읽으며, 이런 상상을 했다. 사실 루비 길리스가 더 나이들어 죽었다면 그 표정은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름도 평소 사람이 잘 짓는 표정과 비슷하게 생긴다. 그리고 얼굴도 성격을 따라 변하게 된다. 그것 역시 타인이 자신을 대할 때 생기는 관성에 큰 역할을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루비의 집 역시 부잣집이고, 누구 못지않게 예쁘며 사랑받았다. 그것만으로 타인에게도 끝없이 사랑받으며 살 수는 없다. 필리퍼와 루비는 타고난 성격이 다르며, 그것 역시 호감과 비호감을 결정하는 큰 지점 중 하나다. 그러니까, 곱게 컸다고 다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잣집의 잘생긴 남자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던 필리퍼 고든은 결국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조너스 블레이크라는, 세인트 컬럼버에서 온 신학생이다. 못생겼고(정말이지 이토록 못생긴 젊은이는 이제까지 본 적도 없어. 235쪽) 가난한데다 빈민가의 조그만 교회에 부임하기로 하는 그. 필리퍼는 이렇게 말한다.


  "오, 내 청춘의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말아줘. 부자였던 때와 마찬가지로 명랑하게 가난해져 보일 테니까. 두고 봐. 요리며 옷을 고쳐만드는 방법도 배울 거야. 장보기는 패티의 집에 와서 배웠고.(255~256쪽)"


  교훈적이고 종교적인 냄새가 풍기는 것은 차치하고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는 상황에서도 명랑하게 굴 수 있는 필리퍼의 태도는 매력적이다. 어떤 상황이든 자신감있게 장난처럼 받아들이는 그녀. 


  "조에게도 그래요. 아주머니는 조에게 동정만 하는군요. 왜 그러시죠? 모두 조를 부러워해도 좋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조는 기막히게 좋은 두뇌와 미모 그리고 순정을 겸한 '나'를 얻었으니까요."
  제임 시너 아주머니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우리는 필리퍼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지 알고 있으니 괜찮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않는 편이 좋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어머나, 나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은걸요. 그렇게 하면 거의 언제나 굉장히 불안한 마음이 될거예요.(300쪽)"


  앤보다 필리퍼 쪽이 더 매력적이다. 그녀가 귀여울 수 있는 것은 어리거나 유치해서가 아니라 솔직해서다. 필리퍼는 같이 사는 앤이나 프리실러보다 어리지 않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스킬에서 조금 서툴고, 스스로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어리다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포지션은 그녀와 잘 어울린다-머리 좋은 필리퍼가 일부러 취하고 있는 포지션이라는 생각도 든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자신의 일상을 즐긴다. 좀 더 오픈된 이 시대에 말하기에도 무안한 '모두 조를 부러워해도 좋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라는 말. 자신을 긍정하고 오픈하는 것이 단점이 되는 세상에서도 그녀는 매력적이다. 굳이 겸손한 척 하거나 수줍게 구는 것보다는 필리퍼처럼 구는 쪽이 더 예뻐보인다.


  동양권의 문화는 겸손을 꽤 큰 덕목으로 친다. 비단 동양 뿐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에게 관대한 문화권은 내가 아는 한도에서는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초중고교를 나오는 학생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제약이 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튀거나 자랑을 많이 하면 당장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 정이 맞기 십상이거든.



  누 구나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있다. 유독 그 욕구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몇 알고 있다. 그 욕구를 드러내다가 결국 잘난척 한다거나, 재수없다는 식의 말질에 희생당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고 그것을 고치고 싶어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굳이 주눅 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깊이가 있다면, 어떤 형태의 '격'이 있다면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손에 쥔 것이 없는데 자랑하는 것은 우습지만, 정말 괜찮은 부분이 있다면, 그리고 드러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싸구려만 아니라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ㄷㄹㅅ 님이 예전에 했던 말인데 '누군가 싫어하는 모습을 고치려고 들면, 고치려는 모습은 안 없어지고 주눅이 든 보기싫은 태도만 더 생길 뿐이야.'라는 말이었다.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일도 아니다. 드러내고 싶으면 어때? 드러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괜히 숨기려고 겸손한척 하며 비비 꼬는 것보다, 정말 솔직하고 기쁘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내게 있어서 Anne, Anne of Green Gables 역시 일종의 guilty pleasure이다. 현실의 영역에서 도망칠 때 읽는 앤은 그러나 다시금 현실로 시선을 닿게 만든다. Guilty pleasure라고 말하는 것의 기반에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욕심이 있는데, 결국 이런 책 역시 현실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죄책감까지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한다.


++

  빨간 머리 앤 완간을 읽은 것은 대학에 와서의 일이다. 그리고 어릴 때는 느끼지 못한-요약본이라 느낄 수 있는 여지도 없었다-종교적 관념과, 이 시대의 여성상 같은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여자신입생'들은 두셋씩 한군데 모여서서 서로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신입생'은 여자들보다 현명하고 단결력이 있으므로 정면 홀의 큰 층계에 모여서 진을 치고 크게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같은 책, 45쪽)

  시대적으로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던(정확히는 그렇게 사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는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이 책은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권해주고 싶은(실은 아이 방에 꽂아둬주고 싶은) 책' 리스트에서 빠졌다. 좀 더 철이 들고, 이 책이 씌여진 사회적 맥락이 이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오기 전까지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