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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29 핑거스미스 - Fear of losing my freedom and individuality 3
카테고리 없음2010. 3. 29. 12:57

핑거스미스Fingersmith
세라 워터스 저 /최용준 역
열린책들
 


  내가 공포영화 혹은 스플레터 비디오, 심지어 스파이더 맨까지 싫어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폭력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적어도 맞고 찌르고 때리는 종류의 폭력에는 익숙하지 않다. 더군다나 비일상적인 형태의 폭력이라면 더 그러하다. 우주정복자 군은 나와 함께 스파이더 맨을 보다가(원래 보려고 했던 영화는 디즈니의 '리턴 투 마이 네버랜드'였는데 그 영화가 없어서 고른 것이다. 물론 내 선택은 아니었다) 그린 고블린이 사람들을 푹푹 찔러댈때마다 움찔거리는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보편적인 형태의 '참을 수 있음'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순간 심장으로 고통이 스며든다. 칼날이 고스란히 살갖을 뚫고 내장을 찢은 후 거기서 올 고통까지 떠오르고, 상상으로 만든 통증이 불편하다. 통증에 유독 약하고, 겁을 내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가 일방적인 소통이라는 부분. 영화는, 특히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언제나 긴장을 하고 보게된다. 이것은 일방적이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미지들'을 통째로 먹어야 한다. 물론 중간에 영화관을 나가버릴 수는 있겠지만 그럴거면 볼 이유가 없고. 그래서 아예 보기 전에 긴장을 하며 '때리거나, 맞거나, 찔리거나, 피나 내장을 흘리거나, 으스스한 분위기와 공포감을 위해 조명과 소리를 조작하거나' 하는 영화는 애초에 볼 리스트에서 빼버린다. 올드보이처럼 멋모르고 보게 되었는데 이를 뽑아버리는 등의 영화나, 금자씨처럼 모르고 보았는데 손가락을 자른다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그래서 좋아하는 영화들은 가볍거나 (최소한)찌르고 맞거나 사람을 긴장하지 않게 하는 것이 주이다. 쏘우라던지, 큐브 같은 영화는 볼 생각도 않고. 같은 폭력이라도 당의(糖衣)를 입고 있으면 수용하는 편이다. 성룡처럼 웃기거나(그런 이유로 옹박은 안본다), 미녀 삼총사처럼 비쥬얼로 승부 하거나하는 영화들은 덜 불편하다. 물론 그 액션들의 비현실성이 끌어당기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텍스트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범죄 소설이나 추리 소설은 폭력도 수용하고 읽는다. 그런 소설은 아무리 형상화를 뛰어나게 한다고 해도 폭력이 '너무 지나치게' 길지 않으며, 설령 그런 부분이 등장해도 가볍게 눈으로 훑으며 페이지를 슥슥 넘겨버릴 수 있다. 다니엘 페낙(Daniel Panac)의 말마따나, 독자에게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보봐리즘을 누릴 권리,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소리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텍스트는 내 속도에 맞춰 읽을 수 있고, 언제나 1:1의 관계이며 결정적으로 영상이나 실제 상황보다 더 분명히 기억된다. 물론 분명히 기억되고 더 흡수가 잘된다, 는 것은 나만의 감상이며 타인에게 적용되는 바는 아니지만.

  여튼, 최근 황 님 외 몇몇이 추천한 책이 '핑거 스미스'다. 동명의 영화도 있다고는 하는데, 영화에는 별로 관심 없고(사실 원작을 읽고 마음에 들면 볼 마음은 있었다.) 'Finger Smith소매치기'답게 뒷골목에서 태어난 소녀 '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두 번 시점이 바뀌는데, '수->모드->수'의 순서이다. 그들은 자신의 어머니의 손에서 키워지지 않았고 외양이 닮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 외에 (스포일러를 배제하고 말하자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열린책들 문고본 기준으로 700여 쪽에 달하는 소설의 흡입력이 대단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에 기대한 것은 '길고 재미있는데다가 생각할 거리도 없어'라는 황 님의 추천사 때문이었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정신병원에 갇히는 인물과 길거리를 헤메는 인물(각기 다른 인물)들의 방황이나 공황, 이들을 촘촘하게 묶고 놓아주지 않는 음모에 숨막히는 공기 같은 것들. 부당한 대접을 당하지만 항거할 방도가 없는 어린 여자아이 등 내가 감정적으로 괴로워하는 모든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다!(여담이지만, 그런 이유로 '다락방의 꽃들'을 읽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읽을 수 없을 것 같고) 처음에는 소설이 가진 흡입력 때문에 조용히 읽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책을 반 이상 읽었으며 정서적으로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호기심 혹은 의무감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인데, 내가 가진 'Fear of losing my freedom and individuality' 즉 자유와 개성을 잃는 상황에 대한 공포는 크고 심각한 것이었다. 정신병원에 갇혀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나(미쳤건 아니건 간에), 전신마비로 의식만 살아있는 상태, 갇혀서 옴쭉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 말이다. 물론 범위를 넘기면 저 두려움은 결혼이나 나이를 먹어감으로서 생기는 인간 관계의 족쇄 같은 것까지 연결될 수 있으나 어쨌든 거기에는 내가 움직일 여지가 있다. 아프고 슬프겠지만 무언가를 잃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은 재미있고, 번역도 아주 잘 된 책이다. '열린책들'에서 출판된 책이니 장정도 괜찮다. 보통이라면 두세권으로 나눌법한 분량을 한 권으로 엮은 것도 좋다. 기본적으로 황 님과 마찬가지로 나도 두꺼운 책을 좋아하니까. 이야기 역시 갈등이 드러난 이후엔 지지부진하고, 두 주인공의 감정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나머지 인물들에게 그다지 이입이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면 매끄럽고 탄탄하다. 하지만


  내가 유순해 진 것은 채찍질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인내심의 잔인함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자의 인내심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 나는 미치광이들이 끝이 없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보아 왔다. 밑이 새는 컵에서 다른 밑이 새는 컵으로 모래를 나르거나, 닳아 올이 풀린 드레스의 땀 수를 세거나, 햇살 속의 먼지를 세거나, 그리고 그 합계를 보이지 않는 장부에 적어 넣는 일을 말이다. 만약 저들이 여성이 아니고, 신사였고 부유했다면, 그랬다면 아마도 저들은 학자나 존경받는 고문으로 통했을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건 물론, 삼촌의 특정 분야에 대한 열정을 완전히 알게 되면서 나중에야 든 생각이다. 그날 나는 어린 나름으로 그 열정의 표면만 슬쩍 곁눈질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 어두움이 보이고 그 침묵이 느껴진다. 사실상 그 어두움과 침묵이 바로 물이나 왁스처럼 삼촌의 집을 채우고 있는 어둠과 침묵이다.

  만약 내가 대항해 싸운다면 나는 저 안으로 깊이 끌려 들어갈 것이고, 그 안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항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저항을 완전히 멈추고, 그 끈적끈적하고 소용돌이치는 물살 안으로 몸을 내맡긴다.

-세라 워터스, [핑거스미스], (열린책들, 2006) 251p

  (사족이지만 나라면 '그날 나는 어린 나름으로 그 열정의 표면만 슬쩍 곁눈질할 뿐이었다'라고 쓸테지만)

 

  과거 소설을 쓰면서, 내 화자는 '똑똑한 척 하나 헛똑똑이인, 억지로 어른스러우려고 과장하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그러나 그것마저 감추고 이성적인 척 하는)'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인물에게 고통은 건조한 살갗을 통해 스며드는 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외적인 흔적이 그렇다는 것 뿐, 실제의 고통은 남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래도 베이컨 간호사는 계속 나를 보았던 것 같다. 상관없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나는 언제나 용기와 기개를 잃지 않았었다. 도망갈 기회만 기다렸었지만 한 발짝도 떼어 보지 못했다. 갑자기 석스비 부인과 입스 씨에 대한 기억, 젠틀먼에 대한 기억, 심지어는 모드에 대한 기억마저도 희미해지는 듯했다. 머릿속이 꽉 찬 듯한 혹은 머릿속에 커튼이 펄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버러의 거리를 다녀 보려 하였으나 길을 잃고 말았다. 병원의 그 누구도 그 거리를 아는 이가 없었다.

-(위와 같은 책, 581~582p)

 

  지금까지 살면서, 트라우마나 어린 시절의 억압 혹은 성(姓)적인 상처에서 기인한 무수한 사례들을 보아왔다. 과에서는 발에 채이고 널릴 만큼 흔한 상처들이지만 과 외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과 안의 사람들처럼 예민한 더듬이와 상처를 담담하게 혹은 난폭하게 말하는 일이 없을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의 이런 공포 혹은 아픔 같은 것들을 어린 시절에 포커스를 맞추어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잡히는 구체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잘 잊어버리고 기억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그런 커다란 사건이 없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무난하고 평범하게 태어나(비록 내적 성장이 조금 불균형하고 기형적이었지만) 무난하게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지금까지 왔다. 이 두려움은 누구도 가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내가 조금 더 기형적으로 자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핑거스미스를 읽고 몇 대 맞은 기분이 든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렇다. 어딘가에 끌려가서 손발이 묶여버린 채 내 의지와 관계없이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 그런 식으로 결말을 맺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끌려나온 감정들이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내가 어린시절 '이렇게 될 거야!'라고 외쳤던 이상향의 작가이다. 감정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읽고 난 후 불쾌함을 느끼나, 완성도가 아닌 그 내용에서 폐부를 찔려서 오는 느낌. 잘 쓴 소설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물감같은 감정을 털어버리기 위해 쓴 포스트가 길어졌다. 읽던 도중엔 원망했지만 황 님의 코멘트 역시 그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충 '핑거스미스를 추천한다. 길고 재미있는데다가 생각할 거리란 별로 없어!'같은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사실이다. 길고 재미있으며 생각할 거리는 별로 없다. 다만 내가 감각적으로 괴로웠을 따름이다.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