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리2010. 4. 1. 18:13

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저












  위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얼른 여길 나가세요.

"나한테 굳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마라. 나를 인정하려는 것이면서도 차별하려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했던가? 잘 생각이 안 나네."(270쪽)



   이름만 보고 책을 사는 작가가 몇 있다. 요네하라 마리, 서경식, 움베르토 에코, 올리버 색스 등등. 구효서도 그런 작가 중 하나고, 지금까지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재미있는 글을 직조할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가사키 파파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도 한국인이 반, 일본인이 반. 그리고 한국의 서사는 과거에, 일본의 서사는 현재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현대사와 어느정도 얽혀있는데, 역사적인 부분은 배경으로 두고 인간 관계로 풀어낸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여튼 일본/한국, 과거/현재 그리고 정군과 한빈이란 두 아버지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스물 한 살의 성장기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한유나는 나가사키의 '넥스트 도어'라는 식당에서 일하는 스물 한 살의 조리사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까지 갔고, psheeee라는 아이디의 엄마가 (한유나의) 아버지 즉 자신의 남편을 만나 그녀를 낳을 때 까지의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준다. 두 이야기는 처음에는 겉돌지만 서서히 직조되는 식. 이야기의 구조만 볼 때는 굉장히 심플하고, 오래전부터 봐왔던 방식이라 편안하게 읽힌다. 흥미로운 스토리기도 하거니와, 캐릭터 역시 재미있다. 원래 구효서가 생생하게 상황이나 장면을 직조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다 치고.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이야기의 전개방식과 배경. 일본 소설이 뜨고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가 선택한 배경과 전개하면서 보이는 에피소드는 최근 유행하는 소설들의 요소를 부러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그런 방식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방식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특유의 장점들을 살려냈기 때문이리라. 뒷통수를 치는 것 같은 반전이나 엄청난 새로움은 없지만, 탄탄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좋다. 최근 신작을 낸 어떤 국내 작가의 책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것도 장점.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까지는 칭찬이었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복선으로 깔아놓는 이야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데다, 속도감을 조절하는 것도 약간 실패한 느낌이 든다. 물론 김훈이 쓴 여성화자보다는 낫지만(생리대에서 물비린내가 난다고 했나.........), 섬세한 감정 표현이 좀 더 들어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거리를 둔 것은 좋은데 너무 멀고, 스물 한 살의 개김성 투철한 여자애 치고 차분하다. 그것이 전반적인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가장 큰 단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구효서의 솜씨는 대단하다. 눈에 보일 것 같은, 흔한 것 같지만 살아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만드는 것의 그의 장점. 내게 가장 깊이 다가온 부분은 등장인물 중 하나인 히데오라는 캐릭터였다.


    물론, 히데오도 알고 있어요. 묻진 않았지만 히데오의 어머니는 말했다. 자기가 위탁아였다는 걸 열네 살 때 알았어요. 그때부터 웃기 시작하더군요.
  히데오는 언제나 밝게 웃으니까요, 라고 했던 건 내가 먼저였던가. 히데오의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달걀 돛단배 접시가 깨끗이 비어버린 뒤였다.
  그걸 안 뒤로 버릇처럼 웃더군요. 안면 근육에 이상이 생긴 아이처럼. 그냥 웃어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중에는 그게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지요. 욕을 해도 웃고 때려도 웃었으니까. 공부를 해서 알게 된 것들이 서오 엉기거나 소화되지 않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어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죠. 성적은 늘 톱이었지만 학교 활동은 제로 상태였어요.
  버려졌던 아이라는 사실을 안 것과 웃음, 그리고 머리속에서만 기능하는 지식과 잦은 이지메.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 건지 전 알 수 없었어요. 그런 현상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밖엔.
  나중에야 알았죠. 히데오의 웃음은 웃음이 아니라 견딤이라는 걸. 그 애는 무언가를 견디는 거였어요. 어쩌면 모든 걸. 견딜 때의 표정은 괴롭거나 심각해져야 하는 건데 히데오는 반대였어요. 괴롭고 심각하게 견딘다는 사실을 저와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히데오는 지나치게 착한 아이였으니까. 가족이 걱정할까 봐.
  하지만 그 때문에 웃는 것만은 아니었어요. 하도 애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까 어디서 누굴 만나든 나는 당신을 해칠 의사가 추호도 없습니다, 라고 지레 표현을 해버리는 거에요. 악수를 청하듯 웃음으로. 거기엔 더 슬픈 소망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 제발 나를 해치거나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언제부턴가 빈 접시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슬프고, 본능적이고, 극단적인 방어 포즈였던 거예요, 히데오의 웃음은. 그러지 마라, 울어라, 일러라, 덤벼라, 하고 가르쳐보지만 안 되었어요. 애들이 쥐어박는데도 그저 웃을 뿐이었지요. 덤벼봐, 하고 때려도 웃고, 울어봐, 하고 때려도 웃고, 한 번만 찡그리면 다시는 안 때리겠어, 라며 때려도 웃었어요.
  -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뿔, 166~167쪽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당한 거리감을 갖고 있다. 폭력과 상처와 아픔에 대해 담담해질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거리. 스물 한 살이 가질 수 있을까 싶은 그런 거리와 관조, 체념의 정서가 어느정도 흐르고 있고 그건 인물들이 뼛속부터(!)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이며, 이 소설의 인물이 아닌 현실의 우리 삶에서도 무수히 마주치는 약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에 슬픈 척, 특별한 척 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짜 상처'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상처이므로 다가가거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더불어, 멀어지지도 않는다. 그냥 상처와 샴쌍둥이처럼 몸의 일부가 붙은 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공감하는 순간 슬픔은 전이된다. 쓸데없이 특별한 척 포즈를 잡는 사람이 아니라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말랑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받을 수 없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외부에 대해 방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격성 없는 인물들은 각자가 그어놓은 자신의 선 안에서 조심조심 움직인다. 나는 이런 이들이 어울리는 내용의 글(일요일들이라던가. 하긴 그건 폭력적 요소가 없지 않지만, 인물들의 태도 얘기다)이나 시트콤류를 좋아하기에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상처를 직시하는 시선들도 좋았고.
  더불어 사람을 규정하고 정체성을 찾는 일. 이름을 붙이는 일이 함의하는 폭력성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그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서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나, 그것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몇 가지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국가, 부모, 지역, 성별 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그리고 그 위에 후천적인 어떤 것들을 쌓아나간다. 신념이나 취향, 성적인 정체성인 경우도 있고. 그 과정을 제대로 겪지 못하면 기형적인 모습을 갖는 거고.

  다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말한다. 욕망도 강하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싶어하기에 심리테스트를 재미있게 하는거고, 자신의 글에 달리는 덧글이나 싸이 방명록을 들락거리는 거다. 그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고... 결국 그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이도 그리 많지 않다.


  여튼 책을 쥔 후 순식간에 읽어치웠다. 요새 재밌는 소설 없냐, 는 질문을 들으면 한동안 대답으로 들이밀 생각이다. 어쨌든 에쿠니가오리보다는 구효서가 삼백 오십배쯤 나은 것 같다.



  경계를 짓고 굳이 이름을 붙이고 그럴 필요 있어요? 나는 쓰쓰이의 작은 방에 가득한 이름 없는 물건들을 떠올렸다. 한국인 일본인 아이누인이라고 각각 이름을 붙이면 구별하는 건 쉽겠죠. 하지만 그때부터 차별이 시작되잖아요. 쓰쓰이에게 자꾸 너는 아이누다 너는 아이누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그 친군 제 입으로 한 번도 아이누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스물세 살의, 넥스트 도어의 훌륭한, 요리사에요.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도 아니죠. 우리 누구도 그를 주방장, 주방장이란 이름으로 부르지 않잖아요. 그가 원치 않아요. 그는 주방장이지만 훨씬 그 이상일 테니까요. 이름 짓는 거, 필요하겠지만 위험하고 불온해. 특히 이 일본에서는. 하루라도 남을 차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게 일본인인 것 같다. 이게 내가 일본인이라는 이름에서 떠올리는 인상이라면 일본 사람들 아주 많이 불쾌하겠죠? 차별하는 거, 그거 따지고 보면 겁나고 두렵고 비겁해서 그러는 거라면 더 기분 나빠하려나? 조화라는 걸 강요하면서 튀는 사람을 조지는 건, 정작 나서야 할 때마저도 나서지 못하는 나약함을 정당화하려는 비겁이다, 이렇게 말하면 일본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못마땅하겠죠?
  -242~243쪽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