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리2010. 4. 2. 15:32
부석사 : 2001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신경숙 외 저
문학사상사









  몇 년 전의 일이다.

   부석사에서 노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이 잘 나올 곳을 찾아 서서 이미 카메라 세팅까지 끝낸 상태였고, 나 역시 필름을 갈아 끼웠다. 손에 쥔 카메라에서 필름 내음이 났다. 사람들이 선 곳에서 멀찌감찌 떨어진 곳에서 아이팟을 켜 음악을 들으며, 신경숙의 문장들을 생각했다. 단순하게, 부석사에 있어서 부석사를 떠올렸지만 '그녀는 질서정연하게 잘 맞추어져 있는 것이면 모조리 어깃장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라는 문장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사람과는 다르다는 허영 혹은 나에게만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아'라고 생각한 까닭에 더 큰 충격을 받았던 옛 기억들을 오래오래 곱씹었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이팟을 내려놓고 사진기를 들었다. 사진은 마음에 드는 만큼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빛이 부족했고 흔들리지 않을까 저어되기도 했다. 날 자체가 너무 흐렸다. 트라이포드를 가져왔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연신 셔터를 눌렀다.
  디카였다면 구도를 잡은 후 수십 장을 찍어댈 것을, 필카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한 번 소모되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라니, 인생을 그처럼 조심조심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디카를 대하듯 대충, 결과를 보고 골라내는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잠깐 딴생각을 하는 새에 해는 쏙 들어가버리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 목이 허전해서 카메라 가방에 감아두었던 스카프를 둘렀다. 얄팍한 천조각이지만 따뜻했다.


  P가 결혼을 한 후에 그녀는 P와 함께 어울려다녔던 동료로부터 P의 말을 전해들었다. 자신이 약혼을 하고 칠개월이나 지난 후에 결혼을 했는데 그동안 단 한번도 그녀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며, 그녀보고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는 P의 말을.

  P에 대한 맹렬한 증오는 그때 싹이 텄다.

  그전까지 그녀는 P 생각을 하면 분간이 서질 않았다. 그녀는 P의 약혼기간 동안조차도 P의 변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P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건 P의 변심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의 변심을 확인한 뒤 자신이 받을 상처에 대해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심리상태로 그녀는 그 시간들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P에게는 그의 약혼 소식을 듣고 단 한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은 독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다니.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P가 그들의 관계 뒤처리까지도 그녀에게 전가하려 했다는 생각. 격렬한 감정이 목까지 차올라 그녀는 당장 P를 만나 따져묻고 싶었다. 그랬냐고 내가 너를 찾아가 왜 약혼상대가 자신이 아니고 그녀냐고 따져 물었다면, 눈물을 글썽이며 너에게 매달리기라도 했다면, 우리들의 관계가 다시 개선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냐고. 그때껏 자신은 인생을 살지 않고 그저 느껴만 왔다는 모멸감. P와 약혼한 여자가 그녀처럼 대학을 졸업한 후 오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서 겨우 오피스텔 하나를 세로 얻은 가난뱅이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 여자의 아버지가 P가 전공한 영문학계의 원로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모멸감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것들 때문에 변심할 P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무엇을 근거로 P와 자신의 사이에는 그런 속물적인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모두 그래도 나와 너는 그렇지 않아,라고 믿고 싶었던 저변에는 돌연 다른 얼굴이 되는 생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허영을 벗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녀가 자신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다닌 P만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세수를 하다가도 이를 닦다가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설령 그녀가 약혼기간중의 P를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P는 약혼녀와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감정의 사치를 누렸던 P. 길을 걷다가도 수시로 그러나 선뜩하게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것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을 때처럼 그랬을 것이다, 확인하며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이후 그녀는 질서정연하게 잘 맞추어져 있는 것이면 모조리 어깃장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신발장의 신발을 아무렇게나 섞어놓았고, 식당에 가면 나란히 놓여 있는 젓가락을 흐트려뜨려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가로수가 참을 수 없어 도끼로 나무둥치를 찍어내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보면 바둑판을 뒤엎어버리고 싶었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정장 차림의 남자들을 보면 다가가서 풀어버리고 싶어 손가락이 굼질거렸다.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망설이며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확 저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좌충우돌하던 나날이었다.
  -신경숙, 부석사



Posted by 이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