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2010. 5. 26. 14:18


  신종플루보다 무서운 질환이 있다. '상상력 결핍증'이다. 이 환자에 대한 예시를 들기 위해, 예전에 고종석의 칼럼 한 문단을 빌려오겠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것은 자유다. 세상에는 별 사람, 별별 취향이 다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무고하게 그의 손에 죽거나 다친 이들의 직계 가족이 지금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꼭 그를 찬양하고 싶으면,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 몸에 흘려보라. 또는 인연이 닿는 조폭에게 부탁해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얻어맞아 보라. 그러고 나서 아는 검사나 판사에게 부탁해 괜히 10년이고 15년이고 감옥살이를 해보라. 그 감옥살이 동안 역사학자 한홍구의 글을 읽어보라. 그 뒤에도 사람들 앞에서 박정희를 찬양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

  -고종석, '친일분자 박정희보다는' 중 발췌. 시사in 2009/12/12. 80p


  종종 폭력에 대해 무감한 사람들을 보고 소스라친다. 사실 슬래셔 무비를 보면서 태연하게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친구까지는 안 가도, 그냥 푹푹 칼로 찌르는 장면을 아무렇잖게 보는 사람들이 놀랍다. 내게는 올드보이도 어려웠다. 물론 이런 건 영상을 보고 곧장 매우 빠르게 통증을 상상하는 내 특성인 걸 안다. 같은 상황을 텍스트로 읽으면 덜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저건 영화의 문제다. 굳이 픽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까지 문제삼으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그러한 맥락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내가 보기엔 폭력이다 싶은 일들을 아무렇잖게 하는 사람들은 단지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학번이에요?"라는 질문이 얼마나 신중하게 던져야 하는지(초면에 던지는 것은 매우 차별적이고 무례하다) 모른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설명해 줘도 잘 모른다면?
  "파업하는 것들은 배가 불러서 그래. 그런 사람들 때문에 경제가 안되는 거야. 지들은 철밥통이면서..." 같은 말을 남발하는 사람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백 번 양보해서, 무식할 자유도 있으니까 하고 생각한다. 상종하지 않을 뿐. 그리고 얼마 전부터 나는 이런 사람들을 '상상력 결핍증 환자'라고 부른다. 모든 결핍이 그렇듯, 상상력 결핍증에도 증상이 있다. 상상력이 결핍된 사람들은 '내가 만약'이라는 단어를 모르며, 입장을 바꿀 줄 모른다. 자신이 쥔 기득권이 자기가 잘나서 주어진 줄 알며, 내가 당연한 듯 받고 있는 것을 위해 (사회 구조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정말, 상상력 결핍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박정희를 찬양하고, "여자들이 애를 안 낳으니까 나라가 망한다, 이기적이라서 그래"같은 소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입에 담는다. 용산 참사를 보면서 "아니 왜? 나가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 법적으로" 같은 소리를 한다. 타인을 때리고 그 사실을 무용담처럼 입에 담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고작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상상력 결핍'이다. 상상력이 없으므로 대충 들리는 얘기,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편견을 수용하는 것. 이건 머리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질병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를 처음 보며, 영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올드보이 정도의 영화를 보여주면 어떨까? 그 폭력성이 얼만큼의 충격으로 다가올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를 뽑고 칼로 쑤셔대는 영상을 보고도 아무렇잖을 수 있는 이면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 영상이 가짜로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관객들, 다른 하나는 영상에 대한 익숙함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수한 영상을 통해서 적당히 재단해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애정만세'의 마지막 부분 쯤에 한 20분짜리 롱테이크 신이 있다. 여자가 길을 걸어가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배경음악도 없고 편집도 없고 현란한 카메라 워킹도 없다. 사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편집도 배경음악도 없다. 지루한 장면들을 한참 지나쳐야 흥미로운 장면이 아주 잠깐 드러난다.
  '애정만세'를 함께 보던 학생들 중 깨어있었던 것은 나 포함해서 한 다섯 명쯤 되었던 것 같다. 드넓은 강의실에서 눈을 뜨고 그 영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미없고, 익숙치 않았으리라. 거기에서 지금까지 보던 영화와 무엇이 다른지 감각하고, 그 다름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테니까.



  미지근한 물에 들어가서,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로 깊은 사고를 거치고 모든 걸 아는 상태에서,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 몸에 흘려보고 박정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냥 손쉽게 남들이 떠드는 것에 젖었을 뿐이다. 제대로된 사고의 과정을 거치거나, 자신의 상황에 대입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소리를 입에 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시를 들지 않았을 뿐, 상대방의 상상력을 의심해볼만한 말들은 많이 있다. 순간순간 '살갗이 곤두선다'는 감각을 느낀다. 상상력 결핍증은 신종플루보다 빠른 속도로 이미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결핍증 주제에 심지어 전염성도 강하다는 게 믿을 수 없다. 개념있고 성실하고 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상력 결핍증 환자인 경우도 많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인종을 차별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동성애는 '다른'거지 '틀린'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몇 학번이에요?"는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는 경우도 보인다.

  상상력 결핍증 환자가 항변할 수도 있다. 다만 몰랐을 뿐이라고.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부분에서 상상력이 결핍될 수 있다. 평생동안 경계할 지점이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결핍을 굳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



Posted by 이카리아